낡은 그림 위에 다시 물감을 얹자, 지워졌던 시간이 캔버스 아래에서 올라왔다
액자 모서리는 닳아 있었습니다. 캔버스에는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고, 한동안 세워져 있던 천 위에는 빛이 바랜 흔적도 보였습니다. 보통이라면 정리됐을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전시에서는 그런 자국들이 오히려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기획초대전 《THETIS : 봄이 머무는 곳》이 지난 14일 제주시 한림읍 금악목장길 청유갤러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고숙진, 고인자, 고은, 권순미, 박은희, 예미킴, 한진, HappyPuring 등 제주 기반 여성 작가 8명이 참여합니다. 회화와 설치, 캐릭터와 업사이클링까지 결은 모두 다르지만 공간 안에서는 묘하게 충돌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기원과 순환, 품어내는 힘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림들은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천천히 번져갑니다. ■ 버려진 그림 위에 다시 손끝이 닿다 예미킴 은 오래된 그림과 프레임을 다시 꺼내 손을 댑니다.낡은 캔버스 위에 새로운 색을 올리고, 버려졌던 액자는 다른 형태로 바뀝니다. 천 아래 남아 있던 균열과 얼룩도 굳이 덮지 않았습니다. 새것으로 되돌리는 데 목적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전 그림 위에 다시 색을 얹고, 남아 있던 자국은 그대로 끌고 갑니다. 버려졌던 재료를 다시 붙잡고, 아래층에 남아 있던 얼룩과 갈라진 흠결까지 그림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한진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림 위에 다시 색을 얹고 일부 물감을 걷어내면서 아래에 남아 있던 층들을 드러냅니다. 캔버스 위에는 서로 다른 시기의 자국들이 퇴적층인양 포개집니다. ■ 제주를 보여주기보다 몸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림들 고숙진·고인자·고은 은 제주 자연의 질감과 생명성을 각자 다른 색과 밀도로 받아냅니다. 익숙한 관광 풍경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돌의 표면, 바람 지나간 자리의 습도, 볕 아래 마른 흙의 질감 같은 것들이 그림 안으로 스며듭니다. 설명보다 물성이 우선 눈에 띕니다. 권순미와 박은희 의 그림은 조금 더 낮은 호흡으로 움직입니다. 빛이 번지는 방향이나 비어 있는 간격, 색이 멈춰 서 있는 리듬과 같은 것들이 천천히 시선을 붙듭니다. 이미지를 몇 초 안에 넘겨보는 일이 익숙해진 요즘에는 오히려 이런 작업들이 더 오래 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해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그림 앞에 잠시라도 멈춰 서 있게 만듭니다. ■ 서로 다른 결들이 한 공간 안에서 어긋나지 않는 순간 HappyPuring 의 캐릭터는 전시장 공기를 한 번 환기합니다. 밝고 경쾌한 색을 사용하지만 캐릭터 안 감정은 예상보다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낯익은 표정 안에 여러 기분을 한꺼번에 얹어둡니다. 전시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화와 설치, 재활용 그림과 캐릭터처럼 서로 다른 성질들이 한 공간 안에서 어색하게 튀지 않습니다. 청유갤러리는 “오랜 시간 서로에게 기대며 성장해온 작가들의 관계와 계절의 온기를 담아낸 전시”라며 “일상 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감각과 마음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따라 작품들을 보다 보면 과장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누가 더 강한 이미지를 만드는가보다, 무엇을 끝내 덮어버리지 않았는지가 그림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금세 만들고 빠르게 소비하는 흐름이 보통이 되어버린 시대, 전시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덧입히고, 남겨두고, 쉽게 밀어내지 않습니다. 전시 《THETIS : 봄이 머무는 곳》은 오는 6월 7일까지 이어집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자세한 문의는 청유갤러리로 하면 됩니다.
2026-05-1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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