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화려했다. 그러나 돈은 제주에 남지 않았다”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14일 추석 직후 ‘제주형 경제성장전략’을 내놨습니다. 민생을 살리고 체감 성장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서의 뼈대는 올해 초 발표한 경제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숫자를 앞세운 보고서, 현장과 어긋난 처방입니다. 결함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얼마나 키웠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돌게 했느냐’입니다. 지금 제주 경제는 ‘돈의 경로’가 설계되지 않은 위태로운 성장 위에 서 있습니다. ■ 성장률 3%의 착시, 체감률 0%의 현실 제주 실질 성장률은 최근 몇 년간 3% 안팎입니다. 그럼에도 가계 연체율은 전국 상위권이고, 소비자심리는 여전히 차갑습니다. 성장의 총량은 늘었지만, 돈이 골목으로 흘러드는 속도와 방향은 멈춰 있습니다. 행정은 늘어난 숫자로 성과를 말하고, 도민은 줄어든 매출과 늘어난 상환으로 하루를 버팁니다. 지금 필요한 평가는 성장률이 아니라 ‘순환률’입니다. 경제는 커졌는데, 정작 그 안의 사람들은 더 빡빡해졌습니다. ■ 관광경제, 외형만 커지고 회계는 섬 밖으로 도정은 관광을 성장의 견인축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결제와 정산의 흐름은 여전히 ‘섬 밖’을 향합니다. 숙박과 렌터카, 입장권 결제 시스템 대부분이 수도권 본사나 해외 서버로 연결돼 있습니다. 데이터와 광고비, 수익의 마지막 정산지는 제주가 아닙니다. 이 와중에 행정과 산하기관, 단체는 각자 플랫폼을 내세웠습니다. 제주도관광협회의 ‘탐나오’, 제주관광공사의 디지털 관광증 ‘나우다(NOWDA)’가 대표적입니다. ‘나우다’는 4만 명이 발급받았지만 제휴업체는 159곳에 불과합니다. 공영관광지 연계도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공사는 “디지털 관광증 지원 조례 제정 이후 할인 혜택이 가능하다”고 해명하지만, 이는 제도를 쫓아가는 행정의 역설에 불과합니다. 플랫폼이 먼저 나오고, 제도가 나중에 덧붙는 구조. 홍보는 빠른데, 정산은 비어 있습니다. 지역 업계 한 관계자는 “탐나오나 나우다나 본질은 같다. 이름만 다를 뿐”이라며, “플랫폼을 늘리는 행정보다, 돈이 더 머무는 구조를 만드는 게 진짜 혁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금융대책, 지원이 아니라 부채 재배치 도정은 1조 원 규모의 저금리 융자, 이차보전, 특별보증을 내놨습니다. 숨통을 틔우겠다는 취지이지만, 실제 현장에선 ‘대출 압박의 연장선’이란 말이 더 많습니다. 연체율이 높고 내수가 식은 상황에서 융자 확대는 결국 부채의 재배치일 뿐 회복의 시작이 아닙니다. 건설업 특별보증 240억 원은 수천 개 업체로 흩어지면 업체당 체감은 미미합니다. 폐업 누적 업종에 분산 보증은 연착륙이 아니라 지연에 가깝습니다. 금융권 전문가들은 “융자와 보증은 집행액이 아니라 회복률로 평가해야 한다”라면서, “지역 결제와 매출 발생 프로그램과 묶이지 않는 돈은 결국 통계용 지출일 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 부동산, 세율로 미분양을 푸는 구식 처방 준공 후 미분양 주택에 대한 취득세 인하는 겉으론 간단한 해법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시장은 세율보다 수요가 문제입니다. 이 정책은 실수요보다 다주택자 감세로 비칠 가능성이 큽니다. 수요를 살리려면 거래세가 아니라 ‘공급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공공매입, 리모델링, 직주근접 임대 전환. 이게 지금 제주에 필요한 ‘살아 있는 공급’입니다. 세금 인하는 과거 방식이고, 현재의 병증엔 맞지 않습니다. ■ 디지털과 신산업, 순서가 틀렸다 AI 행정, UAM, 스마트팜, 우주산업, 그린수소. 단어는 근사하지만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정책은 현장 분석 → 인프라 설계 → 제도 고정 순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도와 홍보가 먼저 달리고, 인프라가 나중에 따라갑니다. ‘나우다’의 조례 후 연계 방침은 그 전형입니다. 기초 데이터 없이 마일리지를 쌓는 구조는 결국 ‘홍보용 실적’만 남깁니다. 미래산업의 간판이 지역산업이 되려면, 소유와 정산의 질서부터 세워야 합니다. ■ 행정, 공사, 협회. 모두의 성과표는 찼다... “도민의 통장은 비었다” 제주도는 정책과 예산을, 관광공사는 플랫폼을, 관광협회는 유통과 가맹을 맡았습니다. 각자의 성과표는 숫자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정작 도민의 통장은 비어 있습니다. 융자액, 가입자 수, 입점 수는 올랐지만 장바구니는 가볍기만 합니다. 도민이 체감하는 건 ‘보도자료 속 성장’이 아니라 ‘잔고 없는 현실’입니다. 이 삼중 구조가 지금 제주 경제의 병목입니다. ■ 바뀌어야 할 건 지표가 아니라 사고방식 제주는 여전히 ‘성장률’이라는 낡은 잣대 위에 서 있습니다. 이제는 성장률이 아니라 ‘순환률’을 봐야 합니다. 돈이 한 번이라도 제주 안에서 돌고, 정산이 도내에서 끝나야 합니다. 그게 진짜 제주형 경제입니다. 결제·정산 구조도 ‘제주형 금융 생태계’로 바꿔야 합니다. 지역 PG(Payment Gateway ·결제대행사), 지역은행, 지역 결제망이 없으면 디지털 관광은 데이터 장사일 뿐입니다. 공영관광지 연계는 조례 이후의 과제가 아닙니다. 시범 협약으로 일부라도 바로 묶고, 실제 데이터를 쌓아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탐나오와 나우다의 중복 구조도 정리해야 합니다. 공공은 브랜드 경쟁이 아니라 정산 기준과 표준 규칙을 세워야 합니다. 그게 ‘디지털 제주’의 진짜 역할입니다. 융자와 보증은 매출을 낳는 구조와 함께 가야 합니다. 거래가 없는 대출은 행정의 실패이고 공공은 건물을 짓는 대신 공간이 다시 쓰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표의 전환, 금융의 지역화, 제도의 즉시성, 플랫폼의 정리, 자금의 실효성, 공간의 순환성. 이 여섯 줄의 순서가 바뀌면, 제주의 경제 언어 자체 달라집니다. ■ 성장률이 아니라 ‘체감률’... 보고서가 아니라 ‘통장’ 오영훈 도정이 말하는 ‘알찬 성장’은 보고서가 아니라 도민 통장 안에서 증명돼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거창한 슬로건이 아닙니다. 돈의 방향을 바꾸는 일, 그것뿐입니다. 외부 플랫폼으로 빠져나가는 결제와 정산을 다시 지역 안으로 되돌리고, 정책 성과를 집행액이 아니라 환류율로 평가해야 합니다. 성장은 이미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이제는 남기는 걸 증명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입니다.
2025-10-1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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