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이불 열 채가 건너간 날”… 바늘과 천이 잇는, 미혼모 그리고 아이의 겨울
누군가의 겨울을 덮는 일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바늘땀에서 시작됩니다. 지난 4일, 예술공간에서 꿰매진 천 조각들이 마침내 미혼모와 아이들이 머무는 애서원으로 건너갔습니다. 230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한 번씩 바늘을 들어 올린 끝에 완성된 아기이불 10채가 이제는 조명 아래가 아닌 일상의 바람 속에서 누군가의 잠을 덮습니다. 예술은 그렇게, 감상에서 실천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자리에 질문 하나 남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겨울을 기꺼이 덮을 준비가 되어 있나.” 5일 제주문화예술재단은, 치유공예그룹 ‘손의 기억’이 4일 서귀포시 청수리에 있는 미혼모 공동생활 공간 ‘애서원’에 아기이불 10채를 기증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이불들은 지난 6월과 9월, 예술공간 ‘이아’에서 열린 ‘손의 연대’의 ‘아기 이불 짓는 날’을 통해 완성됐으며 모두 230명의 도민과 관광객, 그리고 10개 단체가 참여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찾은 이유는 모두 달랐습니다. 어떤 이는 아이의 겨울을 직접 감싸고 싶어 발걸음을 옮겼고, 바늘을 처음 쥔 이들은 서투른 손끝의 떨림을 천천히 눌러 앉혔습니다. 제약을 안고도 한 땀 한 땀 호흡을 맞춘 손이 있는가 하면, 여행의 짧은 틈을 내어 작은 조각 하나를 얹고 지나간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시간과 체온,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한 장의 직물 위에 조용히 포개졌습니다. 전시장 벽면에는 ‘연대의 벽’이 세워졌습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짧은 문장들이 천 조각 사이사이 놓였습니다. “오늘의 바느질이, 어떤 아이의 내일을 덥히길.” 익명으로 남은 문장들은 조각보 위에 덧대어져, 전시장에 잠시 머물렀던 모든 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가 됐습니다. ■ 조각보는 불완전하고... 그래서 하나가 된다 조각보는 늘 균질하지 않습니다. 천의 폭, 색의 농도, 모양도 각각 다릅니다. 누구 하나로 완전하지 않다는 마음이 겹겹이 이어지면서 비로소 하나의 직물이 됩니다. ‘손의 기억’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준 건, 바느질이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는 오래된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개의 조각은 어떤 사람의 기억이고, 또 다른 조각은 타인이 남긴 시간입니다. 그것이 한 장의 이불로 이어질 때, 그 직물은 ‘우리’라는 관계를 품게 됩니다. 불완전한 조각들의 결함이 곧 완결의 조건이 됩니다. 프로젝트는 그런 불완전함을 사회적 치유의 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잘 꿰맨 땀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삐뚤어진 선과 서툰 매듭까지 모두 ‘정상적인 결’로 받아들이는 태도. 지금 제주가 조용히 꿰매고 있는 공동체의 감각입니다. ■ 예술, 전시장에서 일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다 프로젝트는 일상 속 워크숍이면서, ‘예술이 어디까지 삶에 개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완성된 아기이불은 전시 공간에서 공개를 통해, 관람의 대상이자 감상의 흔적을 거쳐 실제로 미혼모들의 겨울을 덮을 직물로 거듭났습니다. 전시장에 걸렸을 때는 작품이었습니다. 애서원에 놓인 순간부터 그건 도구이자, 보호막이며, 한 사람의 몸을 덮는 ‘생활’이 됩니다. 이 과정은 최근 예술계에서 논의되는 ‘소셜 프랙티스 아트(social practice art)’, 그리고 돌봄의 미학을 다루는 ‘케어 에스테틱스(care aesthetics)’ 개념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작품은 감상이 끝나는 순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다시 시작되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아기이불 프로젝트는 그 철학의 가장 현실적인 구현이자 증명입니다. 전시장에서 손을 맞댄 시간은, 이불을 건네받은 미혼모와 아이들의 공간에서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 누군가의 얼굴 없는 서명, 바느질 자국으로 남다 이불 어디에도 참여자의 이름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바느질의 길이, 서투른 모서리, 혹은 어딘가 살짝 비뚤어진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기이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의 기록입니다. 나의 결핍, 또는 너의 희망, 우리를 위한 응원이 천 위에서 만나고, 그 흔적들이 비로소 누군가의 일상을 감쌉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시민은 기증식에서 “내가 꿰맨 천이 실제로 이곳에 오는 걸 보니, 누군가의 겨울을 함께 지킨 기분이에요. 매년 다시 오고 싶어요”라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그 소감은 이 프로젝트의 미학적 핵심이자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예술은 감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덮는 방식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 돌봄이 ‘개인의 책임’으로 남지 않도록 제주라는 공간은 고립과 확장이 동시에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관광객과 이주민이 섞이며 속도는 빨라졌지만 돌봄은 여전히 가정 내부 누군가, 혹은 개인의 책임이자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미혼모와 아이들의 일상 역시 그 구조 안에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건넨 건 ‘이불’이 아니라, 돌봄을 둘러싼 사회적 책임이라는 감각입니다. 바느질이라는, 제법 오래된 언어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환기하는 일. 그 실천이 애서원에 도착한 순간, 돌봄은 한 집단의 부담이 아닌 지역이 함께 나누는 몫으로 재배치됩니다. ■ “우리는 서로의 겨울을 덮을 수 있을까” 아기이불 열 채는 숫자만으로 보면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직물에 남은 손끝의 총량을 떠올린다면, 프로젝트는 이미 하나의 서사적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올의 실이 다른 실과 만나 매듭을 만들면서, 230명의 시간이 겹쳐져 한겨울을 덮었습니다. 전시장을 찾았던 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남긴 땀과 온기는 애서원의 방 안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가 밤중에 몸을 말아 이불을 당길 때, 어쩌면 ‘나를 위한 온기’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온기’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지도 모릅니다. 돌봄은 일방적 시혜나 반환의 관계가 아니라, 흩어져 살아온 삶들이 어느 순간 서로를 잠시 맞대는 하나의 사건에 더 가까워집니다. 아기이불 위를 흐르는 바느질 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물음에 닿게 됩니다. “도움을 건네는 손과 도움을 받는 손을 가르는 경계는 정말 존재할까?” 혹은 “바늘을 든 그 순간 이미 그 구분은 사라졌던 게 아닐까?” 그 답을 굳이 언어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한 장의 이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 위에 스며 있는 온기와 서로 다른 손들이 이어낸 결, 그리고 그 위에서 고르게 들려오는 아이의 숨소리에서 알게 됩니다. 돌봄은 한 사람의 바느질이 아니라, 여럿의 마음이 모여 완성된 직물이라는 사실을.
2025-12-0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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