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시간을 품는 순간, 행복은 다른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제주의 겨울빛은 낮고 부드럽습니다. 그 빛이 금속에 닿으면 색은 천천히 번지고, 표면 아래에 오래 머물던 시간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아라동 심헌갤러리에 들어서면 먼저 작품의 색보다, 금속이 전하는 묵직한 온도를 느낍니다. 차갑게 시작된 재료가 색을 만나 다른 표정을 띠고, 그 변화가 설명보다 먼저 몸으로 들어옵니다. 전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12월 1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고난영·이설아 2인전 ‘소소한 행복’은 행복을 정의하려 들지 않습니다. 두 작가가 오랜 시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작업을 통해, 작고 사소해 보이는 하루의 순간들이 어떻게 하나의 형상으로 남는지를 보여줍니다. 급하게 솟구치는 감정보다는 일상에서 천천히 쌓인 경험이 금속 위에 흔적을 남기고,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그 누적된 시간과 마주합니다. ■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들… ‘과정의 시간성’이 드러나는 순간 공예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결과물뿐 아니라 과정에 축적된 시간을 중요하게 다뤄 왔습니다. 최근 공예 비평에서는 이를 두고 ‘과정의 시간성(craft temporality)’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빠른 생산과 속도를 기준으로 삼는 산업 논리와 달리, 공예에서는 얼마나 빨리 만들었는가보다 어떤 시간들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가 작품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이번 전시는 그 말의 의미를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보이게 하는 쪽을 택합니다. 작품을 보면 형태보다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금속을 두드리며 생긴 미세한 요철, 유약이 식고 굳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두께감,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되풀이한 흔적이 색과 섞여 한 화면을 이룹니다. 행복이라는 말도 이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여러 순간이 차곡차곡 쌓인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 고난영… 두드림의 리듬으로 다시 일어나는 금속과 민화 고난영 작가의 작업은 두꺼운 동판을 자르고 두드리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금속은 쉽게 모양을 허락하지 않기에, 작가는 망치질 하나하나에 호흡을 실어 재료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을 찾습니다. 그렇게 남은 표면 위로 칠보의 색이 올려지면, 민화 속 호랑이·까치·봉황·꽃 같은 도상이 다른 결을 띠며 등장합니다. 여기서 민화는 단순히 전통 이미지를 옮겨 놓은 장식이 아닙니다. 금속이라는 재료의 저항, 두드림의 리듬, 칠보의 색이 겹쳐 만들어낸 새로운 장르가 됩니다. 관람객은 먼저 화려한 색보다 표면의 리듬을 보고, 그 위에 얹힌 도상이 뒤따라 들어옵니다. 이 순서가 고난영이 말하는 ‘소소한 행복’의 방식입니다. 먼저 작업의 시간을 만나며, 그다음 이미지를 접하는 구조입니다. ■ 이설아… 유약 아래에 남겨둔 계절과 빛, 반복이 만든 색의 깊이 이설아 작가는 은판 위에 은선을 세우고 투명 유약을 여러 차례 구워 올리는 유선칠보 기법을 사용합니다. 한 번 유약을 올리고 굽는 과정마다 식는 시간을 온전히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이 쌓일수록 색은 더 깊고 단단한 인상을 갖습니다. 유약 아래에는 제주 바다와 산야에서 가져온 색감,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얻은 인상이 얇게 눌러 담겨 있습니다. 장신구나 작은 합(盒)처럼 손에 쥘 수 있는 작업에서도, 관람객은 표면의 화려함보다 먼저 그 안쪽에서 올라오는 층위를 느끼게 됩니다. 이설아의 작업은 “색은 한 번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여러 번의 굽기와 식힘, 다시 올리기와 다듬기를 거친 색이기에, 말보다 천천히 도착하고 그만큼 더 오래 남습니다. ■ 제주에서 작업을 이어간다는 것… 조용하지만 확실한 지속의 힘 두 작가는 제주에서 오랜 시간 금속공예를 이어왔습니다. 빠르게 소비되는 도시의 속도와 달리, 제주에서 공예가 지속된다는 것은 하나의 작업이 제 세계를 갖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기꺼이 견디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 전시는 작품 그 자체와 더불어, ‘제주에서 계속 만든다’는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함께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쌓아온 시간은 지역 예술 생태계 안에서 이미 견고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역 안에서 꾸준히 축적해온 공예의 시간은, 전시를 통해 관람객을 만납니다. ■ 전시를 나서는 순간, 남는 건 작은 울림 전시를 보고 나오면 ‘소소한 행복’이라는 제목이 쉽게 소비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금속 표면에 남은 빛의 흔들림, 유약이 굳는 동안 생긴 변화, 작업 도중 잠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시간까지 모두 하나의 경험으로 남습니다. 작고 구체적인 장면이 모여, 각자의 삶을 버티게 하는 어떤 온도를 만듭니다. 행복을 앞세워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람객이 자기 안쪽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느낌을 잠시 붙들어 볼 시간을 마련합니다. 말보다 작업의 시간이 먼저 다가오는 전시입니다. ■ 두 사람을 만든 시간 원광대학교 귀금속보석공예학과를 졸업한 고난영 작가는 네 차례의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을 통해 금속 기반 칠보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두드린 동판 위에 칠보의 색을 더해 민화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며, 제주 금속공예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설아 작가는 미국 메사이어 칼리지(Messiah College)와 템플대학교 타일러 스쿨 오브 아트(Temple University, Tyler School of Art)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습니다. 유선칠보 기법을 중심으로 자연의 빛과 계절감을 색으로 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현재 은채 갤러리앤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제주와 일상의 장면을 작품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2025-11-2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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