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마레에 펼쳐진 ‘제주 황홀경’… 고혜정, 은으로 빚은 《Silver Shadows》
파리 마레의 나무 마루 위로 늦여름의 빛이 길게 미끄러집니다. 그 끝에 은빛 형상들이 놓였습니다. 멀리서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없이 많은 금속 조각이 촘촘히 이어진 구조가 드러납니다. 민들레 홀씨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들이 서로 기대고 벌어지며 둥근 몸을 만들고, 그 틈으로 파고든 창빛이 안쪽 깊은 곳에서 회색 음영을 길어 올립니다. 한 발 옮길 때마다 표정도 달라집니다. 희게 떠오르던 은은 금세 짙어지고, 조금 전 보이지 않던 내부의 선과 틈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유리 표면에는 창과 사람, 작품이 겹칩니다. 단단한 금속이 눈앞에서는 부풀고 흩어지며 어느 순간 숨을 쉬는 듯합니다. 민들레가 바람을 타고, 물이 돌의 모서리를 깎고, 성게의 표면에 촘촘한 질서가 자라나는 섬. 그곳에서 오랜 시간 몸에 밴 감각이 파리 한복판에서 낯선 ‘황홀경’으로 펼쳐졌습니다. 제주 출신 금속공예가 고혜정의 개인전 《Silver Shadows》입니다. 지난 4일 파리의 예술·디자인 중심지 마레에 자리한 Galerie Maria Wettergren(마리아 베테르그렌 갤러리)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오는 10월 3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고혜정이 제주 자연을 바라보며 축적해온 감각과 은을 다뤄온 긴 시간을 한 공간에 풀어놓습니다. ■ 풍경, 몸을 통과해 형태가 되다 작품 곳곳에는 제주에서 길어 올린 자연의 감각이 배어 있습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흩어지는 움직임, 물과 시간이 다듬은 조약돌의 곡선, 성게 표면을 채운 반복의 질서와 쉼 없이 흐르는 물의 리듬까지. 오랫동안 바라보고 몸에 익힌 자연의 결은 은 위에서 고혜정만의 조형언어를 이룹니다. 풍경은 그렇게 점과 선, 곡면과 틈으로 옮겨갑니다. Galerie Maria Wettergren은 전시에서 고혜정이 자연의 내적 움직임을 포착하는 태도를 도가의 ‘무위(無爲·Wu Wei)’와 연결합니다. 은 표면에 번지는 미세한 농담에서는 동양 수묵을 떠올리게 하는 깊이를 읽어냅니다. 그 감각에 물성을 부여하는 것은 수없이 되풀이되는 손의 시간입니다. 은 조각들을 마이크로 웰딩으로 하나씩 이어갈수록 조형은 몸집을 키우고, 내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틈이 생겨납니다. 그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그림자가 깃듭니다. 은과 공기, 음영이 함께 하나의 형태를 이룹니다. 《Silver Shadows》라는 제목도 이 지점에서 선명해집니다. 바라보는 자리가 달라질 때마다 은의 표면에는 새로운 농담이 번집니다. 촘촘한 틈으로 스며든 빛은 안쪽의 그림자를 깊게 만들고, 비어 있는 공간까지 조각의 일부로 끌어들입니다. 시선이 움직이는 동안 빛과 그림자는 겹치고 흩어지며 작품의 밀도와 깊이를 끊임없이 달리합니다. ■ 3,000여 개 홀씨, 한 작가의 시간을 만들다 고혜정의 작업이 국제 무대에 강한 인상을 남긴 계기 가운데 하나는 〈The Wishes〉였습니다. 2023년 청주국제공예공모전에서 이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민들레 홀씨를 연상시키는 3,000여 개의 금속 요소를 하나하나 이어 붙였습니다. 수천 개의 홀씨 형상이 겹치고 이어지며 어느 순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닮은 조형으로 자라났습니다. 작품은 이듬해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건너갔습니다. 2024년 열린 국제 공예 행사 ‘Homo Faber(호모 파베르)’에 출품돼 관람객 투표(Public Vote) 수상작으로 선정됐습니다. ‘Homo Faber’는 라틴어로 ‘만드는 인간’을 뜻합니다. 2025년에는 벨기에 보고시안 재단의 디자인·공예상(Boghossian Foundation Prize)을 받았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보폭이 더 넓어졌습니다.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FOG Design+Art에 이어 5월 TEFAF New York에 참여했고, 〈Dreams in the Cradle〉와 〈Passion〉, 〈Dandelion Dish〉, 〈Song of Pebbles〉 등이 뉴욕에서 소개됐습니다. 그리고 9월, 파리. 공모전의 한 작품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조형언어가 이제 한 작가의 이름을 건 개인전 전체를 채웁니다. 도시를 거듭 옮겨온 작품의 중심에는 오래된 질문 하나가 흐릅니다. 자연은 어떻게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는 어떻게 손을 거쳐 자신만의 언어가 되는가. ■ ‘Simply Nature’… 반복 속에서 생겨나는 차이 고혜정은 오랫동안 ‘Simply Nature’를 작업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자연을 오래 바라보고 그 안에서 제 형태가 생겨나는 방식을 찾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질서는 자르고 두드리고 접합하는 금속공예의 장으로 옮겨갑니다. 그 과정에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를 만들고 또 하나를 잇습니다. 같은 손놀림이 수백 번, 수천 번 이어지는 동안 매번 미세한 차이가 생겨납니다. 같은 나무에 달린 잎마다 결이 다르고, 같은 파도를 통과한 돌마다 곡률이 다르듯 그 작은 차이들이 모여 전체 리듬을 만듭니다. 마이크로 웰딩은 여기서 기술을 넘어 작품의 문법이 됩니다. 접합의 흔적과 손의 시간이 그대로 조각의 구조에 새겨집니다. 은은 부풀고 움푹 패이며 서로 기대고 연결돼 하나의 유기적인 몸을 얻습니다. 작업실에서도 선택은 이어집니다. 금속을 세척할 때는 화학 약품 대신 식초와 소금 등을 쓰고, 전시 구조물은 작품 운송 상자로 다시 활용합니다. 작품을 만드는 손끝의 감각이 재료를 쓰고 남기는 방식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 파리의 공간을 만나 조각이 움직이다 흰 벽과 나무 바닥, 높게 열린 창. 고은숙 코앤코 대표가 현지에서 보내온 사진 속 전시장은 여백이 넉넉합니다. 사이사이 은빛 조각들이 놓였습니다. 투명 케이스 안의 둥근 형상은 공중에 뜬 듯, 창가의 작품에는 시시각각 다른 음영이 내려앉습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몸을 낮춰 안쪽을 들여다봅니다. 몇 걸음 옮겨 다시 바라보고, 금속 조각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벌어지는지 시선으로 좇습니다. 《Silver Shadows》는 보는 이들의 움직임까지 끌어들입니다. 정면에서 환하게 떠오르던 표면은 자리를 옮기면 농담을 달리하고, 안으로 스며든 빛은 촘촘한 틈을 빠져나와 바닥과 벽에 또 하나의 형상을 만듭니다. 사람이 움직이고 빛이 달라질 때마다, 같은 조각에서 조금 전과 다른 장면이 열립니다. 전시를 기획하고 현장을 함께한 고은숙 코앤코 대표는 “오랫동안 보아온 작품인데도 파리의 사람들과 공간 속에 놓이는 순간 전혀 다른 표정으로 다가왔다”며 “관람객들이 가까이 다가가 작품 안쪽까지 천천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면서 고혜정의 조형언어가 이제 더 넓은 세계에서 읽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 더 깊은 언어로 남는 방식 고혜정에게 고향의 기억은 이력 한 줄보다 훨씬 깊숙한 곳에 자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겪은 바람과 물, 돌과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은 오랜 시간을 거쳐 작가의 문법이 됐습니다. 바람의 운동은 흩어지는 구조로, 물이 남긴 시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옮겨집니다. 자연에서 포착한 반복과 증식의 질서는 수천 개 금속 요소가 맞물리는 구조 속에서 새로운 생명성을 얻습니다. 그 시간은 작품의 밀도와 리듬, 은을 다루는 손의 방식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Galerie Maria Wettergren은 2010년 파리에서 문을 열어 현재 마레를 기반으로 예술과 디자인, 건축과 공예, 과학과 기술을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고혜정 역시 이 갤러리의 국제 작가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청주에서 베네치아로, 브뤼셀과 샌프란시스코, 뉴욕을 지나 파리 마레까지. 지도 위의 점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 긴 이동 속에서 한 사람의 감각은 고혜정만의 조형언어로 깊어졌습니다. 창으로 스며든 빛이 다시 은빛 표면을 훑습니다. 촘촘한 틈 사이로 음영이 흩어지고, 안쪽에 잠겨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라보고 만지고 기억했던 자연의 시간이 한 작가의 손을 오래 통과한 끝에 지금 이곳에 닿았습니다. 은으로 피어난 ‘제주 황홀경’. 지금, 파리에서 고혜정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2026-09-06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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