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의 정치가 끝났다… 민주정부를 움직였던 한 축이 사라졌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별세했습니다. 향년 73세입니다. 이 소식은 민주 진영 정치가 작동해온 한 흐름이 마무리되는 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늘 전면에 서지 않았지만, 언제나 승부의 방향을 결정짓는 자리에 있던 정치인으로 기억됩니다. 민주정부 4번의 탄생 과정마다 그의 판단이 개입됐고, 그 이름은 결과로 증명돼 왔습니다. ■ 베트남에서 멈춘 심장… 마지막까지 정치의 현장에 서다 이 전 총리는 지난 22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아태지역 운영위원회 참석을 위해 베트남 호찌민으로 출국했습니다. 23일 현지에서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병원으로 이송됐고, 심근경색 진단을 받은 뒤 심장 스텐트 시술과 에크모(ECMO) 치료를 받았습니다. 호흡은 일부 안정을 찾았지만 의식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고, 현지 시각 25일 오후 2시48분 숨을 거뒀습니다. 민주당 인사들은 현지에서 에어 앰뷸런스를 통한 국내 이송 가능성까지 논의했지만, 상태는 끝내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평통은 유가족과 함께 국내 운구와 장례 절차를 협의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는 끝까지 정치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해찬에게 ‘완전한 은퇴’라는 말은 끝내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 운동권 1세대, 제도 정치의 중심으로 1952년 충남 청양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유신 체제에 맞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민청학련 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민주화 운동 세대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제도 정치로 진입한 인물입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36세로 최연소 의원이었습니다. 5·18 및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보여준 직설적인 질문은 단숨에 정치적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이후 관악을에서 5선을 지냈고, 세종으로 지역구를 옮긴 뒤에도 정치적 입지를 유지했습니다. 지역구 후보로 7번 출마해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2016년 컷오프 이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세종 선거는, 정치적 생존력과 독자성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 ‘실세 총리’와 책임의 선택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이해찬의 내각 이력은 늘 논쟁과 함께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속에 국정 전반을 총괄한 총리였습니다. 야당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고, 대정부질문에서 거침없는 언어로 맞섰습니다. ‘호통 총리’라는 별명은 이 시기 붙었습니다. 2006년 ‘3·1절 골프 파문’은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책임을 인정하며 사의를 표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실책 이후 권력을 붙잡지 않는 선택 역시 이해찬식 정치로 기억됩니다. ■ 민주당의 킹메이커, 뒤에서 판을 짠 정치 이해찬을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표현은 ‘킹메이커’입니다. 후보보다 한 발 뒤에 있었고, 선거보다 한 수 앞을 봤습니다. 1995년 조순 서울시장 당선, 1997년 DJP 연합 성사, 2002년 노무현 정부 출범, 2017년 문재인 정부 탄생, 2020년 총선 180석 압승까지. 민주정부 4번의 탄생 과정마다 그의 판단이 작동했습니다. 정치에 주저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이끈 인물도 그였습니다. 감각이나 이미지보다, 승부가 성립하는 조건을 먼저 읽는 정치였습니다. ■ 정치적 어른,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선택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이재명 대통령을 쉽게 놓지 않았습니다. 당내 비주류였던 이 대통령을 “당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규정하며 공개적으로 방어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고인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2021년 대선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고, 지난해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임명은 권력과의 거리보다 신뢰가 먼저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이해찬이 남긴 판단의 연장선 위에서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는 해석도 정치권에선 제기됩니다. ■ 논쟁과 한계까지 포함해 남은 이름 그의 정치에는 늘 논쟁이 자리했습니다. 강한 언어, ‘피해 호소인’ 발언, 협치 인식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육부 장관 시절 수시 확대와 제도 개편은 ‘이해찬 세대’라는 말까지 남기며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판조차 그의 정치적 무게를 전제로 성립했습니다. 이미지로 소비되는 정치인이 아니었고, 감정으로 움직이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언제 이길 수 있는지,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를 끝까지 계산한 정치인이었습니다. ■ 한 시대의 퇴장,그리고 남은 궤적 민주당은 고인을 ‘민주주의의 산증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거리에서 시작해 권력의 중심까지 도달했고, 다시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 정치가 권력을 만들고 유지해온 방식이 여기서 한 장을 덮습니다. 자신만의 선택과 판단으로 정치를 견인해온 궤적은 한국 정치에 하나의 기준으로 남았습니다.
2026-01-2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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