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사라지던 시간, 끝내 목소리로 지나갔다
그 시간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대신 몸에 남습니다. 보이는 것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 있고, 그 안에 오래 머문 사람에게만 보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서울삼성병원 16층 서쪽 병동. 길게 이어진 복도와 끊어지는 걸음, 몇 걸음 옮기다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반복 속에서 말은 길게 남지 않았습니다. 붙잡으려 하면 빠지고, 붙잡았다 싶으면 이미 흩어진 뒤였습니다. 그래서 쓰기를 멈춥니다. 문학동네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다원예술가 장혜령은 그 자리에서 다른 방식을 꺼냅니다. 말을 꺼내고, 그 말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넘깁니다 공연 <목소리극 프로젝트: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5월 8일 제주시 ‘팔즈’, 10일 서귀포 ‘시네마홈’에서 열립니다. ■ 16층 서쪽, 멈춘 시간 안에서 문장은 버티는 방식으로 바뀐다 2024년 의료 공백이 길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작가는 서울삼성병원 16층 서쪽 병동에 머뭅니다. 머문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버티는 시간에 가깝습니다. 와이파이가 닿지 않는 공간, 끊긴 연결, 바깥으로 닿지 않는 하루 속에서 문장을 다시 붙잡습니다. 엄마의 두 발을 붙잡는 심정으로, 흩어지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이어붙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멈춥니다. 이 시간은 글로는 온전히 남지 않는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 한 사람이 시작한 말, 관객의 입을 거치며 다른 이야기를 부른다 공연은 조용하게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말을 꺼내고,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객석 어딘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붙습니다. 준비된 대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기억입니다. 누군가는 말을 잇고, 누군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지만 그 침묵까지 남습니다. 공연에는 정해진 결말이 없습니다. 같은 형태로 반복되지 않고, 그날의 목소리와 그날의 시간으로만 구성됩니다. 낭독으로 시작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읽히던 문장이 다른 사람의 말로 바뀌고, 그 말이 몸의 움직임과 소리로 겹치며 하나의 흐름을 만듭니다. 이야기를 남기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기억이 시작이 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맞물리면서 하나의 시간이 만들어집니다. 말로 남지 않던 시간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과합니다. 잠깐의 형태를 갖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라집니다. ■ 제주 신화 ‘오늘’, 병원 복도에서 다시 마주하는 시간 이 작업은 제주 신화 <원천강본풀이>에서 출발합니다. 이름 없이 나타난 존재가 ‘오늘’이라는 이름을 얻고 자신의 시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병원 복도에서 더듬더듬 움직이는 걸음을 보며 그 순간이 겹칩니다. 지금만 붙잡고 있는 시간,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쌓이면서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이 됩니다. 신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통해 되짚는 방식입니다. ■ 모래 위에 쓰는 글처럼, 남지 않는 방식 그대로 드러낸다 장혜령 작가는 “잘 보이지 않고 가시화되지 않는 삶을 표현하려면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글 대신, 목소리를 택합니다. 돌봄의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만 잘 남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하루와 이름 붙지 않는 감정, 비워지는 시간 속에서 중요한 순간들은 쉽게 흩어집니다. 작가는 이를 모래 위에 쓰는 글에 비유합니다. 남기려 하면 흩어지고, 붙잡으려 하면 지워지는 방식입니다. 이 공연은 붙잡지 않습니다. 말이 나오고 다른 말이 생겨나고, 잠시 머물다 다시 흩어지는 흐름 자체를 드러냅니다. 사라지는 방식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깁니다. ■ 문장에서 밀려난 감각, 무대로 옮겨온 작가의 작업 궤적 장혜령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한 뒤 2017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잔상들』, 『진주』,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 등을 펴냈고, 이후 소설을 공연으로 옮기며 낭독과 사운드, 영상 작업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작업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2025년 서울과 전주,익산, 광주 등지의 독립서점에서 ‘목소리극’을 처음 선보였고, 올해 제주문화예술재단 다원예술 분야 창작 지원에 선정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배우와 음악가가 더하는 현장성,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구조 이번 공연에는 배우 장윤실과 음악가 전호권이 참여해 서로 다른 몸과 소리의 결을 더합니다. 공연은 5월 8일 오후 7시 30분 제주시 ‘팔즈’, 10일 오후 1시 서귀포 ‘시네마홈’에서 진행됩니다. 유료 공연(음료 포함)이며 사전 예약입니다. 휠체어 관람도 가능합니다.
2026-04-2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