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에서 시작된 시간이 숲이 되기까지... 레지던시는 왜 작업실이 아니라 ‘서사’가 되었나
전시는 보통 결과를 보여주지만, 이번 전시는 시간을 드러냅니다.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어디에 머물렀고 그 머묾이 무엇을 바꾸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제주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 100호전 ‘곳에서, 곶으로’는 레지던시를 제도의 성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문 시간이 어떻게 감각을 변형시키고, 선택을 늦추며, 작업의 세계를 확장시키는지를 조용히 증명합니다. 작품을 나열하지도 않습니다. 작가 개인의 성취를 앞세우지도 않습니다. 한 점의 ‘곳’이 어떻게 다층적인 관계와 시간의 결을 품어 하나의 ‘숲’으로 증식해왔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 결과보다 먼저 드러나는 것, 작품이 아니라 시간 이번 전시는 오백장군갤러리 전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으로, 2018년 설립 이후 제주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를 거쳐 간 37명의 작가가 참여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작품의 양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전시장을 따라가다 보면, 서로 다른 작업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감각이 먼저 포착됩니다. 속도는 느려졌고, 결정은 신중해졌으며, 무엇을 더할지보다 무엇을 끝까지 붙잡을지를 고민한 흔적이 반복됩니다. 전시는 완성된 결과보다, 그 결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레지던시는 여기서 작업실이 아니라, 작업의 리듬을 바꾸는 구조로 기능합니다. ■ 제주는 배경이 아니라, 작업을 흔드는 조감이었다 작가들은 굳이 제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다와 돌, 풍경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이곳에 머물며 겪은 몸의 변화와 감각의 이동이 작업 안에 남아 있습니다. 외부와의 거리, 행동의 제약, 날씨와 계절의 반복, 함께 머무는 타인의 존재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업에 개입합니다. 이 다양한 변수는 영감을 주기보다,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동합니다. 제주는 풍경이 아니라 조건이었습니다. 그 조건은 작업을 미세하게 흔들며 결과의 방향을 바꾸고, 매번 의외의 얼굴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 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 ‘머무를 수 있는 경계’ 제주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는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시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작가들을 맞아왔습니다. 단기 성과보다 체류의 밀도를 중시했고, 고립과 교류가 동시에 가능한 구조를 유지해 왔습니다. 작가들은 이곳에서 생산성을 증명하기보다, 작업의 방향을 다시 묻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민간이 운영하는 레지던시로서 담소미술창작스튜디오는 제도의 언어보다 현장의 리듬에 가까운 선택을 해왔습니다. 프로그램은 느슨하지만 방임적이지 않았고, 개입은 최소화하되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100호전은 그 운영 방식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한 번 머물다 떠난 공간이 아니라, 작업의 결을 바꿔놓고 오래 남는 장소였다는 사실이 전시를 통해 드러납니다. ■ 통제되지 않는 요소들이 작업을 바꾸는 순간 전시에서 작업은 더 이상 작가 개인의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기후와 시간, 공간의 물성처럼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작업에 개입하며 선택의 궤도를 틀어 놓습니다. 작업은 계획을 벗어나고, 그 벗어남이 오히려 작품의 성격을 또렷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의도만으로 완결되지 않는 창작이, 전시에서는 숨기지 않고 드러납니다. 작가가 중심에 있지만, 모든 것을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그 균형이 전시의 밀도를 더 촘촘하게 만듭니다. ■ 개인전이 아닌 집합적 서사, 100호전 100호전이라는 형식은 기념이 아닙니다. 소통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증거입니다. 작품들은 독립적이지만 고립돼 있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같은 시간의 층위를 통과해 왔다는 공통의 감각을 공유합니다. 그래서 전시는 경쟁보다 병치에 가깝고, 비교보다 교차에 가깝습니다. 전시는 개별적이었지만, 이어 붙여 보니 숲이었습니다. 나무 하나하나는 달랐지만, 같은 기후와 토양을 지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군락이었습니다. ■ 머문 시간이 세계가 되는 방식 ‘곳에서, 곳으로’라는 제목은 이동을 말하는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머묾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정착한 시간이 어떻게 선택을 바꾸고, 관계를 만들며, 결국 작업의 세계를 확장시키는지를 이 전시는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장소는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은 작품보다 오래 남아, 무던히도 마음을 다잡게 합니다. 전시는 제주 돌문화공원 내 오백장군갤러리 제1~5전시실에서 이어집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 휴관입니다. 개막일인 18일 오후 1시 30분부터 장준석 미술평론가의 개막 강연이 열리고, 오후 3시 전시 개막식이 예정돼 있습니다.
2025-12-1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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