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떠난 적 없이, 다만 다른 방향으로 계속 쓰이고 있을 뿐이었고” 이동 이후의 장소, 회화는 무엇을 붙잡을 수 있나
어떤 장소는 떠나는 순간 과거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장소는 떠난 이후에야 비로소 현재형으로 작동합니다. 그 두 번째 경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시는 돌아봄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기억을 정리하지도, 서사를 복원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하나의 질문을 먼저 꺼냅니다. “장소는 이동한 뒤에도 여전히 장소로 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감정이 아니라 조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 위에, 회화는 재배치됩니다. ■ 도착지가 아닌 곳에서 시작되는 전시 이 전시는 어디에 왔는지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미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는지를 전제로 삼습니다. 전시가 열린 도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상징도, 맥락도 전면에 놓이지 않습니다. 생활의 소리, 언어가 겹치는 공기, 체류의 시간이 만들어낸 거리감이 자연스럽게 전시장 안으로 스며듭니다. 전시는 그 배경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위에 회화를 올려놓습니다. 그 선택이 전시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 풍경을 밀어내고 남은 것들 작품들에는 익숙한 형상이 등장합니다. 산과 바다, 마을과 자연의 기호들입니다. 그것들은 화면의 중심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이끄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다뤄온 시간의 방식입니다. 반복된 손의 움직임, 지워지지 않고 남은 흔적, 서두르지 않은 붓질의 밀도가 화면의 구조를 만듭니다. 이 회화들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람자의 속도를 낮추고, 시선을 오래 붙잡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 귀환이 아닌 방향에 대한 이야기 전시 제목에 포함된 ‘향(向)’은 되돌아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동이 전제된 상태에서,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습니다. 작품들은 과거를 회수하지 않습니다. 그리움을 전면에 세우지도 않습니다. 대신 장소가 다른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전시는 고향을 호출하지 않습니다. 고향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차분하게 받아들입니다. ■ 설명 대신 지속으로 남는 작업들 전시는 성과를 전시하지 않습니다. 대표성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작업이 계속 이어져 왔다는 사실 자체를 전면에 둡니다. 미술기획·갤러리 ‘활작’ 소속 작가들은 “이번 전시는 제주를 설명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달라진 조건 속에서 제주의 감각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 시도”라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디에 놓일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고 밝혔습니다. 작업은 해설 없이 놓이고, 각각의 밀도로 공간을 점유합니다. ■ 역사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회화는 전면에 남는다 이 전시는 역사 전시가 아닙니다.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역사를 전면에 세우지도 않습니다. 자리에 남는 것은 회화입니다. 사건이 아니라 감각, 설명이 아니라 위치, 기념이 아니라 지속입니다. 그런 전시는 묻습니다. 장소는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동한 이후에도, 그것을 여전히 장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번 전시를 기획한 미술기획·갤러리 ‘활작(活作)’은 제주시 전농로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해 온 전시 기획 단체이자 전시 공간입니다. 지역 작가의 작업을 소개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특정 지역성이나 양식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작업이 놓이는 조건과 맥락을 재배치하는 기획에 주력해 왔습니다. ‘활작’은 전시를 결과물로 소비하기보다, 작업이 축적돼 온 시간과 그 지속 가능성을 점검하는 장으로 전시를 설정해 왔습니다. 기획자의 해석이 앞서기보다는, 작가 집단 내부의 논의 과정과 작업의 상태 자체가 전시의 일부로 작동하도록 설계해 온 점이 특징입니다. 이번 전시의 기반이 된 ‘탐라만상’ 프로젝트 역시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탐라만상’은 제주를 하나의 이미지나 주제로 고정하지 않고, 각기 다른 작업이 ‘제주’라는 조건과 어떻게 관계 맺어 왔는지를 점검하는 연속 기획입니다. 공통된 양식이나 선언을 전제하지 않으며, 각 작가가 축적해 온 시간과 매체 선택, 화면의 밀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2024년 1월 지오갤러리에서 열린 ‘갑진동행–제주작가 아트소품전’을 시작으로, 같은 해 7월 ED갤러리에서 ‘탐라만상 제주작가작품전’으로 이어졌습니다. 2025년 5월에는 다시 ED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고, 같은 해 8월 일본 오사카 마이돔에서 열린 일본아트페스티벌에 제주 부스 형태로 참여하며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오사카 살토갤러리 초대전 ‘탐라만상 제주·향’은 이러한 연속 기획이 해외 전시 환경이라는 다른 조건 위에 놓였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시 점검하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동 이후에도 작업은 어떤 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장소가 바뀐 뒤에도 작업은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자리입니다. 전시에는 미술기획·갤러리 ‘활작’ 소속 탐라만상 작가들과 초대 작가 등 22명의 작가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탐라만상 작가로는 강애선, 고예현, 김수오, 박인동, 부상철, 부이비, 송미지자, 양승윤, 오건일, 오승익, 윤진구, 이미순, 이수진, 이율주, 전재현, 최창훈, 한우섭 이 포함됐습니다. 강지미, 고은, 임상철, 현경화, 고(故) 장경염 이 초대 작가로 함께합니다. 회화와 혼합매체를 중심으로 한 작품 50여 점이 소개됩니다. 17일부터 28일까지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인근 살토갤러리에서 열리며, 오프닝은 18일 오후 4시입니다
2025-12-1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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