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 세계를 만든다는 그 착각… ‘포스트휴먼’이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 한림읍 금악목장길 옛 우사(牛舍)에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만들고 알고리즘이 인간의 선택에 개입하는 시대. 기술이 인간의 영역으로 빠르게 들어오는 동안 미술의 관심은 식물과 동물, 사물과 물질, 흙과 물, 기후와 환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누가 세계를 만들고, 누가 감각하며, 무엇이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가. 지난달 서울 성북동에서 던져진 서울청년비엔날레의 질문이 이번에는 제주에서 다른 해석을 기다립니다. 《2026 서울청년비엔날레 특별전 초대작가전》이 오는 9월 4일부터 27일까지 제주시 한림읍 청유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오는 9월 4일부터 27일까지 제주시 한림읍 청유갤러리에서 열립니다. 국내외 작가 28명이 회화와 설치, 복합매체를 통해 인간과 기술, 자연과 사물 사이에서 생겨나는 관계를 서로 다른 작업 언어로 풀어냅니다. 서울에서 제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전시는 ‘장소’라는 조건을 새로 갖게 됐습니다. 전시장이 자리한 금악에는 오름과 목초지, 농경지가 펼쳐집니다. 청유갤러리 역시 가축을 기르던 공간을 고쳐 만든 곳입니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의 관계를 묻는 작품들이 이곳에 놓이면서 ‘포스트휴먼’은 제주라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 의미를 새로 얻습니다. ■ 인간이 바라보던 세계, 그 안에 다시 인간을 놓다 오랫동안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자연은 풍경이 됐고 사물은 사용의 대상이 됐습니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했고 미술은 인간의 눈과 손, 경험을 통해 세계를 포착했습니다. 21세기의 현실은 이 익숙한 구도를 빠르게 바꾸고 있습니다. AI는 인간이 남긴 방대한 이미지를 학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알고리즘은 무엇을 보고 듣고 소비할지에 영향을 줍니다. 기후 변화도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합니다. 비와 바람, 온도와 바다의 변화가 농업과 도시, 산업과 생활의 시간표를 바꾸고 인간이 환경에 가한 변화는 다시 인간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동물은 서로 다른 감각으로 주변을 인식하고 식물은 환경 변화에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땅속에서는 균류가 거대한 연결망을 형성하며 생태계의 순환에 관여합니다. 인간의 감각과 판단만으로 세계 전체를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들도 점점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포스트휴먼은 이런 변화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다시 묻습니다. 배경으로 밀려났던 자연과 사물, 기술과 생명을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로 보고 인간 역시 그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놓습니다. 인간의 위치가 달라지면 이전까지 주변부에 있던 요소들의 입지가 함께 바뀝니다. ■ AI 시대, 미술이 인간 바깥을 바라보는 이유 생성형 AI의 등장은 예술에도 오래된 질문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누가 만드는가, 무엇을 창작이라고 부를 것인가, 인간의 감각과 기계의 계산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를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국제 미술계에서는 질문의 초점이 AI에서 인간 중심의 감각과 지능 자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적응과 생명의 감각, 인간 공동체의 판단과 기계의 계산을 서로 다른 방식의 지능과 작동으로 해석하려는 흐름입니다. 2025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가 자연적·인공적·집단적 지능을 함께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런 변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애비 올드리지 록펠러 조각 정원에서 선보이는 피에르 위그의 〈UUmwelt〉에서는 인간의 뇌 활동 데이터와 머신러닝이 결합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기계가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만큼 인간만 생각하고 감각하며 세계를 움직인다고 여겨온 기준도 함께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시야 안에는 식물과 동물, 미생물과 기계, 흙과 물, 데이터와 기후가 모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들어옵니다. 포스트휴먼은 이미 달라진 현실을 해석하는 하나의 감각입니다. ■ 성북동에서 금악으로… 같은 질문도 장소가 달라지면 달라진다 눈여겨볼 대목은 제주라는 장소입니다. 서울 성북동에서 시작된 질문이 한림읍 금악에 놓이면서 작품을 둘러싼 조건도 달라집니다. 금악에는 오름과 목초지, 농경지와 마을이 자리합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아온 땅과 사람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 한 풍경 안에 포개져 있습니다. 제주 전체로 시선을 돌리면 관계는 더 복잡해집니다. 바람은 생활의 조건이면서 전력을 만드는 에너지가 되고, 바다는 생태계이자 관광과 산업의 공간입니다. 숲과 곶자왈에는 보전의 가치와 개발의 요구가 동시에 걸려 있습니다. 물의 양은 농업에 영향을 주고 기온은 작물의 생육을 좌우합니다. 제주에서 자연은 오래전부터 삶의 조건이었고 때로는 위험이었으며, 자원이면서 인간의 선택을 제약하는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제주를 바꿔온 만큼 제주라는 환경도 사람의 삶과 산업, 생활방식을 끊임없이 바꿔왔습니다.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배경으로 선명하게 나누기 어려운 제주 자체가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맥락이 됩니다. 서울에서 인간과 기술의 경계를 향했던 질문도 금악에서는 생명과 물질, 땅과 기후, 인간의 생활이 얽힌 현실까지 범위를 넓힙니다. 전시를 보고 갤러리 밖으로 나오면 금악의 초지와 오름, 농경지가 그대로 펼쳐집니다. 작품 안에서 따라갔던 문제의식이 실제 바람과 땅, 살아 있는 것들 속에서 다시 구체적인 감각으로 돌아옵니다. ■ 옛 우사에 들어선 전시장… 청유갤러리가 더하는 맥락 전시가 열리는 청유갤러리도 이번 특별전을 이해하는 데 빼놓기 어렵습니다. 지난해 문을 연 뒤 신진작가 공모 기획전 《Layer》를 비롯한 여러 전시를 열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인간과 동물, 자연과 사물, 기술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포스트휴먼이 들어옵니다. 우사였다는 공간의 이력을 전시 개념과 그대로 겹쳐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전의 쓰임이 남긴 시간과 맥락은 이번 전시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목축은 사람의 노동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동물과 먹이, 물과 땅, 계절과 기후가 함께 작동해야 생활의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청유갤러리가 자리한 금악 역시 이런 관계들이 오랜 시간 실제 생활 속에서 축적돼온 곳입니다. 작품에서 던진 질문과 현실의 제주 사이에 긴 이동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청유갤러리의 장소성은 이번 특별전의 성격을 더 또렷하게 만듭니다. ■ 작가에서 기획자로… 예미킴이 이어놓은 흐름 서울에서 시작된 전시의 감각을 제주까지 잇는 작업은 예미킴 예술감독이 맡았습니다. 2024년 서울청년비엔날레에서 미술평론가상을 받은 작가였고, 올해는 전시의 방향을 설계하는 총괄역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KAIST에서 건설환경공학을 공부한 뒤 시각예술 작업을 이어왔고, 2023년에는 제주 빛의벙커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피어나다》를 선보였습니다. 빛과 공간, 이미지와 기술 사이를 오가던 작업의 관심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여러 작가와 공간을 엮는 기획으로 확장됐습니다. 예미킴이 제시한 주요 감각은 ‘유동’과 ‘연대’입니다.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면서 사고와 행동의 방식을 바꾸고, 자연은 인간의 개입을 받으며 변합니다. 변화한 자연은 다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관계가 생길 때마다 존재의 위치와 성격도 달라집니다. 서울에서 제주로 전시를 옮긴 선택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주제라도 어떤 장소에 놓이느냐에 따라 작품의 의미와 관객의 경험은 달라집니다. ■ ‘공존’이라는 말보다 복잡한 현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할 때 ‘공존’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현실에서는 서로 기대고, 이용하고, 침범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한 존재에게 생긴 변화가 다른 존재의 조건을 바꾸고, 달라진 조건은 다시 주변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AI와 인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인간이 AI를 만들었고 AI는 인간이 생산한 데이터를 학습합니다. 인간은 다시 AI의 추천과 판단, 이미지와 문장을 일상에서 사용합니다. 제주에서도 이런 얽힘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관광은 자연환경을 자산으로 삼고 늘어난 이용은 다시 환경에 부담을 줍니다. 에너지는 생활을 지탱하지만 발전시설은 경관과 생태를 둘러싼 논쟁을 낳습니다. 개발과 보전, 사람의 편의와 다른 생명의 터전도 같은 공간에서 충돌합니다. 포스트휴먼은 이런 관계를 아름다운 조화로 정리하기보다 서로의 존재와 조건을 계속 바꾸는 현실 속에서 더 선명한 의미를 얻습니다. ■ 28명의 작가, 같은 질문에서 서로 다른 길을 내다 제주 특별전에는 안수진, 김정민, 김정희, 남주연, 김시연, 김명자, 정영희, 이주희, Jenni, 윤귀화, 차주희, 최경희, 김은주, 김현경, 손은영, 박정희, 예미킴, 정채령, 정형준, 이양희, 황보지영, 유종욱, 박은희, 노혜정, 산울림(김창훈), 양경렬, 이경석, 이인화 등 국내외 작가 28명이 참여합니다. 회화와 설치, 복합매체 등 작업마다 출발점은 다릅니다. 신체를 다루는 시선이 있고 물질과 환경을 중심에 둔 작업이 있습니다. 이미지와 기술의 관계를 파고들거나 생명과 사물 사이의 경계를 살피는 다양한 방식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접근은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갈래로 풀어냅니다.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에 작품을 맞춰 세우기보다 인간을 중심으로 그어온 여러 경계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다시 짚어봅니다. 관객에게 필요한 것도 정답보다 작품을 거치며 익숙하게 지나쳤던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일입니다. 《2026 서울청년비엔날레 특별전 초대작가전》은 9월 4일부터 27일까지 청유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오프닝은 5일 오후 3시이며 송재경 제주미술협회장과 이경모 미술평론가 겸 서울청년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예미킴 예술감독, 참여 작가들이 함께할 예정입니다.
2026-08-20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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