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금악 푸르고… 오래된 우사에서 ‘청유’를 만났다
금악으로 들어가는 길은 온통 푸르렀습니다. 밭과 목초지가 낮게 이어진 위로 하늘이 크게 열렸고, 구름은 오름을 타고 느긋하게 흘렀습니다. 멀리 풍력발전기는 바람을 받아 천천히 돌았습니다. 길은 점점 좁아졌습니다. 그 길을 따라 금악 안쪽으로 들어가자 낮은 지붕을 인 오래된 건물 한 채가 나타났습니다. 한때 소가 머물던 우사, 지금의 청유갤러리입니다. 문을 열자 갈라진 벽과 거친 돌, 검게 밴 나무와 콘크리트 바닥 사이로 그림과 설치작품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새로 세운 흰 전시벽 바로 옆에는 세월의 얼룩을 품은 우사 벽이 남았습니다. 한발 더 나서자 색이 시선을 붙잡습니다. 차주희의 〈Bloom〉입니다. 노랑과 파랑, 붉은색과 초록색 사이로 유기적인 형상들이 뻗어가고, 바로 곁 유리창 너머로 금악의 푸름이 들어옵니다. 캔버스의 색과 창밖의 풀과 나무가 한 시야에서 맞물립니다. 그림을 좇던 눈이 유리 너머로 건너가자 조금 전 지나온 금악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안을 보면 건초와 돌, 오래된 나무가 작품 곁에 있습니다. 그림과 풍경, 옛 우사와 오늘의 미술이 서로 다른 시간을 품은 채 한자리에 놓였습니다 오늘(15일) 제주시 한림읍 금악의 청유갤러리에서 만난 《2026 서울청년비엔날레 제주 청유갤러리 초대작가 특별전-인간 너머의 감각 : 유동하는 존재들의 연대》입니다. 앞서 서울에서 선보인 전시가 제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품고 온 질문은 같지만 금악에서는 답보다 먼저 풍경이 끼어들었습니다. ■ 작품을 보는데, 자꾸 그 곁이 보인다 미술관의 흰 벽은 말이 적습니다. 주변의 색과 흔적을 걷어내고 조명과 동선을 정돈해 작품에 시선을 모읍니다. 청유에는 많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기억이고 기록입니다. 그림을 보다가 균열에 눈이 가고, 색을 따라가다 오래된 나무의 결에 머뭅니다. 발아래 콘크리트에는 시간이 지나간 자국이 있고, 작품 곁에는 건초가 놓였습니다. 돌벽 앞에 회화가 걸리고 오래된 목재 구조물 곁으로 작품이 이어집니다. 흰 전시벽 너머로 얼룩진 우사의 흔적이 드러나고, 유리창에는 금악의 풀과 나무가 들어옵니다. 작품 하나에 눈을 두어도 주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림을 보던 눈은 벽으로, 돌로, 나무로 건너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리창을 넘어 금악까지 갑니다. 무엇을 중심에 놓고 무엇을 주변으로 둘 것인지도 쉽게 정해지지 않습니다. 청유에서는 작품을 보던 눈이 자꾸 그 곁으로 움직였습니다. ■ 우사를 지우지 않고 미술을 들이다 청유갤러리가 금악에 문을 연 것은 지난해 4월입니다. 박은희(작가·갤러리스트, 청유갤러리 관장)는 오래된 우사를 전시장으로 바꾸면서 벽의 균열과 돌, 오래된 나무를 가능한 한 살렸습니다. 이곳이 지나온 시간을 그대로 품은 채 오늘의 미술을 들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도 우사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서울의 전시 공간과 다른 무언가를 전하고, 청유가 가진 공간성을 작품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박은희의 설명입니다. 청유를 이야기하며 박은희가 꺼낸 표현은 ‘거대한 타자와 연대의 캔버스’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간을 다시 둘러봅니다. 금이 간 벽에는 우사의 시간이 배어 있고 돌과 나무는 저마다 다른 표면을 드러냅니다. 건초는 이곳이 갤러리가 되기 전 다른 생명이 머물던 장소를 떠올리게 하고, 창밖에서는 구름이 지나며 빛이 움직입니다. 박은희에 따르면 참여작가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작품이 청유에 놓이자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는 반응이 잇따랐습니다. 같은 작품이 거친 벽을 만나고, 다른 빛을 받고, 창밖 금악과 한 시야에 놓이면서 전에 없던 표정을 얻었습니다. ■ 인간의 자리에서 한발 비켜서면 제주 특별전을 총괄 기획한 예미킴은 인간 중심의 사고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인간성’의 정의가 균열을 맞는 지금을 전시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화두를 통해 새로운 감각의 영토를 탐색하려 했다는 설명입니다. 참여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익숙한 인간의 시선에서 한발 비켜섭니다. 다른 생명과 사물, 물질과 환경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과 비인간이 얽히고설킨 관계를 회화와 설치, 복합매체로 풀어냈습니다. 예미킴이 말한 ‘새로운 생태지도’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홀로 중심을 차지하기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가는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 놓입니다. 예미킴은 이번 전시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보다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자리라고 설명했습니다. ■ 소가 떠난 자리에서 ‘우리’를 묻다 우사 안을 다시 걷습니다. 한때 이곳에는 소가 머물렀습니다. 소가 떠난 자리에는 다른 시간이 들어왔습니다. 작품이 걸리고 사람들이 오가지만, 우사가 지나온 시간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돌과 나무, 벽에 밴 흔적 사이로 오늘의 미술이 들어왔고 유리창 밖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랍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 들어온 것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같은 공간을 나눠 갖습니다. 박은희가 말한 ‘거대한 타자와 연대의 캔버스’, 예미킴이 말한 ‘새로운 생태지도’가 여기서 하나의 공간으로 겹쳐집니다. 그래서 《인간 너머의 감각 : 유동하는 존재들의 연대》라는 제목도 이곳에서는 설명보다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돌벽 앞의 그림, 건초 곁의 작품, 유리창 너머 금악,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사람. 저마다 다른 것들이 서로의 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금악에서 갤러리를 지킨다는 것 청유에는 전시장 안의 이야기와 함께, 금악에서 이 공간을 꾸려가는 현실이 있습니다. 제주시내를 벗어나 금악 안쪽까지 들어와야 만나는 민간 갤러리입니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뒤 1년 반가량이 흘렀습니다. 전시가 끝나면 다음 작품을 들이고 공간을 유지하며 다시 관객을 불러야 합니다. 박은희는 금악에서 갤러리를 꾸려가는 일이 녹록지 않다고 했습니다. 공모전과 기획전을 이어가고 있고, 올해 연말까지 대관 일정도 잡혀 있습니다. 도심에서 떨어진 위치는 청유가 안고 가야 할 조건입니다. 관객은 이곳에 닿기까지 오름과 밭, 목초지를 지나옵니다. 금악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하늘은 넓어지고 길은 좁아집니다. 갤러리의 문을 열기 전부터 금악은 이미 관객의 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눈으로 우사 안의 작품을 봅니다. 유리창에는 풀과 나무가 들어오고,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빛은 오래된 벽과 작품 위를 오갑니다. 전시장 안과 밖의 경계도 그렇게 조금씩 흐려집니다. ■ 그래서, 청유였다 화이트큐브의 흰 벽과 정돈된 조명은 작품의 색과 형태에 시선을 모읍니다. 주변을 비워 작품 스스로 말하게 하는, 현대미술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전시 방식입니다. 청유는 다릅니다. 금이 간 벽과 거친 돌, 세월이 밴 나무가 작품 곁에 있고 건초가 놓인 자리 너머로 새로 세운 흰 벽이 이어집니다. 유리창은 금악을 들이고, 바깥의 빛은 시간에 따라 작품과 벽의 표정을 바꿉니다. 여기서는 작품과 그 곁의 것들이 함께 앞으로 나옵니다. 사람의 손이 닿은 것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 오늘 들어온 것과 먼저 시간을 견딘 것이 한 시야에서 서로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청유였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박은희가 우사의 시간을 살려 만든 공간에 예미킴이 던진 ‘인간 너머’의 질문이 놓였습니다. 소가 머물던 시간, 사람의 손이 남긴 흔적, 돌과 나무의 물성, 오늘 들어온 미술과 창 너머 금악까지 그 질문 안으로 들어옵니다. 청유는 자신이 지나온 시간까지 작품 곁에 놓았습니다. ■ 다시, 문밖으로 한 바퀴를 돌아 문밖으로 나오자 들어올 때 지나온 풍경이 다시 펼쳐졌습니다. 밭과 목초지 사이로 길이 이어지고 전신주와 전깃줄이 지나갑니다. 멀리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같은 길인데 이번에는 땅과 풀, 사람이 일군 밭과 그 사이로 난 길까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 우사 안에서 그림과 건초, 돌과 나무, 오래된 벽과 새로 세운 벽이 한 공간에 있던 모습이 겹쳐집니다. 예미킴이 던진 질문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들어올 때는 풍경이 먼저 보였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는 그 풍경을 이루는 존재들이 보였습니다. 자라는 것과 시간을 견딘 것, 사람이 만든 것과 사람보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것이 함께 있었습니다. 아, 금악은 푸르러. 차마 눈을 감기 아까운 오후였습니다. 《인간 너머의 감각 : 유동하는 존재들의 연대》는 오는 27일까지 제주시 한림읍 금악목장길 2 청유갤러리에서 열립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총괄 기획은 예미킴이 맡았습니다. 참여작가는 안수진, 김정민, 김정희, 남주연, 김시연, 김명자, 정영희, 이주희, Jenni, 윤귀화, 차주희, 최경희, 김은주, 김현경, 손은영, 박정희, 예미킴, 정채령, 정형준, 이양희, 황보지영, 유종욱, 박은희, 노혜정, 김창훈(산울림), 양경렬, 이경석, 이인화 등 28명입니다.
2026-09-1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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