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었던 계절에 피어난 말 없는 그림들”..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계절에 난 너를 만나
# 한 계절을 살아낸다는 감각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꽃은 피고, 잎은 짙어지며, 햇볕은 예년보다 뜨거울 것이라 예보되지만, 정작 우리 안의 시간은 더 이상 같은 얼굴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반복된다는 이유로 놓쳐버린 감정들, 뻔하다는 전제 아래 지워진 감각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 날들 안에, 어쩌면 가장 많은 것이 스며들고 지나갔는지도 모릅니다. 전시는 바로 그 ‘예상 가능성’의 장막을 걷어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각자의 삶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의 진동을 붓으로 눌러 담은 두 명의 작가. 말보다 먼저 움직인 붓질은, 예고되지 않은 감정과 풍경의 조각들을 밀도 높게 화폭 위에 남깁니다. 예측 가능한 흐름에서 어긋난 자리, 균열의 틈에서 포착한 장면들. 그 침묵의 무게를 그대로 견뎌낸 회화의 장면들이, 지금 제주의 오래된 골목 안에서 조용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제주 구도심 관덕로 골목 끝자락, 전시 공간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6월 한 달간 열고 있는 전시 ‘너무 뻔한 계절’은 반복과 기시감 속에서 떠오르는 감각을 회화로 포착한 2인전입니다. ■ 너무 뻔해서 낯선 계절, 제주에서 펼쳐지는 회화적 사유 2025년 제주문화예술재단 창작공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기획된 전시는, ‘빈공간에서 빈공간으로’라는 연간 테마 아래 이어지는 연속 기획의 네 번째 장면입니다. 참여 작가인 이주영과 장고운은 40대라는 감각적 문턱 위에서 창작과 육아, 생계와 예술이 겹쳐진 시간을 각자의 회화 언어로 밀도 있게 번역해냅니다. 50여 점에 이르는 작업은 일기장처럼 무척 개인적이고, 일상에 섞여 사라지기 쉬운 사소한 장면들을 꿰어냅니다. 그 장면들은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 감정의 진동, 미처 붙잡히지 않은 사유의 파편을 화폭 위에서 가만히 응시합니다. ■ ‘예술과 육아의 병치’ 속에.. 감각의 잔상을 긷다 장고운 작가는 “삶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그릴지 미리 정하지 않은, 오직 그리는 행위에 대한 몰입입니다. 무성한 풀, 계절의 열매, 시선에 걸린 풍경들. 모든 것은 기획되지 않은 채 감각에 의해 길어 올려진 이미지들입니다. “그리는 행위 자체가 유일하게 남은 것 같다”는 고백처럼, 작가의 작업은 어떤 감정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지나간 자리에 감각의 여운만은 분명하게 남습니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붓질은 더 단단하고 이미지는 말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명확히 도달하는 감각입니다. “매년 같은 꽃이 피고 지는데도, 볼 때마다 새롭고 질 때마다 아쉽다”는 이주영 작가는, 반복되는 계절 속, 풍경에 스며든 정체불명의 감정을 좇습니다. 작가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모아도 좀처럼 완성되지 않는 퍼즐 같다”고 자신의 회화를 설명합니다. 작업은 결론을 지우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완결된 서사보다는 감각적 미완의 상태를 견디는 회화적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 흐름은 작가 개인의 내면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전시의 정서를 구성하는 중심 축으로 작용합니다. 이들의 작업은 어떤 정해진 의미도 제시하지 않지만, 감각의 잔상과 응시의 리듬을 고스란히 품고 보는 이들의 내부로 침투합니다. 불완전하다는 감정, 다 닿지 못한 사유, 설명되지 않는 풍경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화면 위에서 각기 다른 언어로 말을 겁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순간을 지나,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계절을 다시 건너고, 마침내 저마다의 해답을 만납니다. ■ 예측 가능한 삶.. 균열의 자리에 피어난 이미지들 ‘너무 뻔한 계절’이라는 전시 제목은, 오히려 전시 전체의 정서를 가장 정확히 또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예측 가능한 흐름, 익숙한 풍경, 반복되는 감정 속에서 문득 떠오른 낯선 균열. 두 작가는 그 틈을 포착합니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 고정된 리듬과 흔들리는 내면의 결이 겹쳐지며, 삶의 감각은 다시 낯설어집니다. 특히 여성 창작자로서 외부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의 표면을 수면 위로 밀어올리는 회화 방식은 반복과 정체, 기시감과 낯섦을 동시에 안고 또 다른 풍경의 언어를 조율합니다. 전시는 언어로 압축되지 않고, 해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 계절을 지나왔나요?” 28일에는 마두영 연극 연출가(제12언어 연극 스튜디오 대표)가 참여하는 작가와의 대화가 예정돼 있고, 박해빈 작가가 진행하는 드로잉 워크숍도 총 4회 열 예정입니다. ■ 비워낸 자리에 머무는 감정의 구조 전시장인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은 물리적 여백이 아닌 감정의 틈을 받아내는 공간입니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공간 지원을 시작으로 2025년 제주문화예술재단 창작공간 프로그램에 연속 선정돼 제주 원도심에서 지속적으로 실험적인 전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빈공간에서 빈공간으로’라는 연간 프로젝트 아래 4월부터 10월까지 8회의 기획전과 5회의 작가 대화, 20회의 드로잉 워크숍이 진행 중입니다. 그 안에서 ‘빈공간’은 말해지지 못한 감정이 조용히 침투하는 벽이면서 동시에 감각이 머무는 틈이며,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게 만드는 구조로 존재합니다. 제주라는 섬의 골목 안에서 이 공간은 하나의 감정적 장소성을 형성해가고 있습니다. ■ ‘작가’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통과한 이들의 화법 장고운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예술사와 전문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베를린 ‘GlogauAir’와 로테르담 ‘Duende Studios’ 등 해외 레지던시를 통해 시각적 감각의 지평을 넓혔고, 귀국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스튜디오 683’, 양주시립 ‘레지던스777’에 입주하며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현재 개인 스튜디오에서 회화로 삶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주영 작가는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하고, 드로잉과 회화를 통해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속에 침잠한 감정을 추적해왔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스페이스빔, 2008), ‘넌 고양이냐 호랑이냐’(플레이스 막, 2012), ‘before dark’(가나아트스페이스, 2015) 등 개인전을 통해 일상의 빈틈에 숨어 있는 ‘은밀한 사건’들을 포착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완결된 해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만난 감각의 흔적이 말을 걸 뿐입니다. 매일이 같다고 믿었던 계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순간은, 어떤 감정은 말보다 먼저 피어나고 말 없이도 오래 남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아트스페이스 빈공간’ 대표인 이상홍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익숙하다고 여겨온 일상의 흐름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들”이라며,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감각들이 얼마나 섬세한 구조로 이어져 있는지, 전시를 통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확인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사전 예약제를 통해 운영됩니다. 예약 시에는 밤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스타그램(@biniartspace) 또는 ‘빈공간’으로 전화 문의하면 됩니다.
2025-06-16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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