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형상을 빌려, 존재에 닿다”... 색은 아래에서 올라오고, 먹은 위에 자리를 잡았다
꽃을 경유하지만, 이 전시의 방향은 끝내 인간을 향해 접힙니다. 김현숙의 작업에서 형상은 질문의 밀도로 변환되고, 색과 먹은 그 질문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압력으로 남습니다. 제17회 개인전 ‘彩/彩/墨/墨(채/채/묵/묵)’은 꽃을 출발점으로 삼아, 존재가 스스로를 호출하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13일부터 19일까지 제주시 연북로 애플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입니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개인전 17회, 국내외 기획·초대전 490여 회 출품이라는 이력은 양(量)의 기록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에 가깝습니다. 채색과 수묵, 장지와 순지, 전통과 동시대 감각은 전시에서 맞물리고, 꽃은 그 겹침 속에서 가장 농도 짙은 기호로 떠오릅니다. ■ 배채법, 색이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 김현숙의 색은 장지의 앞이 아니라, 뒤에서 출발합니다. 여러 번 쌓인 채색은 수분과 농도를 견디며 시간을 통과하고, 그 축적의 결과가 비로소 위로 스며 나옵니다. 배채법은 기법이라기보다 시간의 압축에 가깝습니다. 색은 즉각 드러나지 않고, 기다림을 거쳐 형상으로 환원됩니다. 전시의 채색은 표면을 장식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색은 정서를 떠받치는 힘이 되고, 그 위에 놓인 꽃의 이미지보다 먼저 작가가 견뎌온 시간의 두께를 전면에 밀어 올립니다. 작업은 빠른 인상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천천히 쌓인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속도로 숨 쉬며, 보는 이의 감각도 그 리듬에 맞춰 늦춰놓습니다. ■ 순지와 먹, 밀도로 형상이 세워지는 과정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이 가장 먼저 느끼는 변화는, 꽃이 ‘보이는 대상’이라기보다 ‘공기를 눌러 오는 기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순지의 병용입니다. 채색이 축적된 장지 위에, 먹 작업이 이뤄진 순지를 빠삐에 꼴레 기법으로 부착하는 구조입니다. 여러 겹의 장지가 만들어내는 안정된 질감 위에, 얇고 민감한 순지가 얹히며 표면의 긴장은 한층 다른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순지 위에 내려앉은 먹은 선보다 덩어리에 가깝습니다. 잎맥은 과장되고, 꽃잎은 먹의 입자로 해체됩니다. 그 과정에 설명보다 압축된 존재감이 먼저 자리를 잡고, 인식은 그 뒤를 따라옵니다. ■ 꽃이 놓이는 자리, 질문이 시작되다 김현숙이 오래 붙잡아온 꽃은 더 이상 특정한 종이나 계절의 표식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꽃은 인식이 작동하는 지점에 놓입니다. 형태가 희미해질수록 감각은 무엇을 끝까지 붙드는지,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그 감각의 경계에 꽃을 남겨 둡니다. 관람객은 자연을 바라보던 일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질문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꽃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감각의 장치로 작동합니다. ■ 40년의 시간, 그리고 태도를 위한 한걸음 김현숙의 시간은 작업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미술관과 제도, 현장을 모두 통과해온 경로는 이력의 나열이 아니라, 작업을 떠받치는 하나의 ‘태도’로 굳어졌습니다. 제주도립미술관장과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회장을 지낸 이력 역시 그 태도가 외부로 드러난 흐름에 가깝습니다. 태도는 작품의 구조 안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채색은 아래에서 축적되고, 먹은 위에서 형상을 단단히 붙잡습니다. 전통은 해체되지 않은 뼈대로 남고, 동시대의 감각은 과잉 없이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합니다. 그 균형은 화면을 안정시키면서도 쉽게 풀어지지 않는 밀도를 만들어냅니다. 꽃은 그 안에서 감정과 시간, 기억과 현재가 만나는 순수의 도상으로 자리합니다. ■ 색과 먹이 전하는 하나의 응답 ‘彩/彩/墨/墨’은 기법의 나열이 아니라, 색과 먹이 만든 응답에 가깝습니다. 배채된 색은 아래에서 서서히 올라와 정서를 채우고, 먹은 그 위에 밀도로 자리합니다. 시간은 층을 이루고, 감각은 겹치며,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형태가 옅어질수록 감각은 또렷해지고, 설명이 줄어들수록 존재감은 더 선명해집니다. 김현숙의 작업은 이 지점에 ‘꽃’을 다시 소환합니다. ■ 꽃이 남기는 질문 꽃은 소리 없이 시선을 붙잡습니다. 빛보다 밀도로, 색보다 층위로 말을 건넵니다. 그 앞에 서는 어느 순간, 이렇게 묻게 될지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가.” 그렇게 김현숙의 꽃은 질문이 처음 생겨나는 자리에 머뭅니다. 한때 ‘꽃’이라 불리던 모습은 천천히 이름을 벗고, 지금은 누군가의 인식 깊은 곳에 온전히 제 무게를 얻으며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 보내는 하나의 단단한 물음으로 남습니다.
2025-12-0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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