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의 경계] ⑤ 기억을 파는 산업... 면세의 끝은 가격이 아니라, 이야기다
면세 산업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매출은 반등했고, 공항은 붐비고, 외국인 관광객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산업의 중심은 여전히 공허합니다. 그래프의 선은 오르지만, 산업의 체온은 차갑습니다. 이제는 “얼마나 팔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았는가”의 문제입니다. 가격 경쟁이 끝나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김지훈의 ‘맥락’] 마지막 편은 가격의 시대가 저물고, 기억의 산업으로 이동하는 면세의 전환점 을 짚습니다. 면세의 본질은 이미 바뀌고 있습니다. ■ 숫자는 회복이 아니라, 재편을 말한다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2025년 8월 전국 면세점 매출은 1조 194억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1조 2,434억 원) 대비 약 18% 감소했습니다. 외국인 매출은 9,756억 원에서 7,330억 원으로 줄었지만 내국인 매출은 오히려 2,677억 원에서 2,864억 원으로 늘었습니다. 단순히 줄었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외국인 중심 산업’에서 ‘내국인 체류 소비형 산업’으로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할인율이 아닌 경험이, 면세의 새로운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래프만 보면 침체지만, 내용으로 보면 산업이 재편되고 있다”며, “면세의 중심축이 공항이 아니라, 시내와 로컬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 회복의 진짜 변수, 제주의 실험 제주는 전국에서 시내면세 구조가 가장 명확한 지역입니다. 면세점협회 통계에 따르면 제주 시내면세점 매출은 2024년 8월 402억 원에서 올해 451억 원으로 12%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매출 상승에도 불구하고, 객단가는 하락했습니다. 명품보다 생활형, 단체보다 개인 중심 소비가 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주 한 면세점 관계자는 “이제 면세점은 브랜드보다 ‘제주의 냄새’를 팔아야 한다”면서, “쇼핑이 아니라 체험, 가격이 아니라 기억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제주는 단지 통계만 아닌, 산업의 방향을 보여주는 실험실입니다. 외국인 입국의 최전선이자, 내국인 소비가 공존하는 지역. 면세 산업이 ‘관광과 유통의 경계’에서 어떤 구조로 살아남을지를 시험하는 현장입니다. ■ 소비는 다시 ‘관계’로 움직인다 면세 산업은 이제 가격에 기반한 할인 판매가 아니라, ‘의미의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가격은 ‘수요’를 움직이지만, 이야기는 ‘기억’을 남깁니다. 소비자는 싸다고 사지 않습니다. “왜 여기서 사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올해 들어 주요 면세점들은 전통적인 할인·적립 이벤트를 줄이고, 체류형 콘텐츠와 공간 체험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옮기고 있습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면세점은 더 이상 가격으로만 경쟁할 수 없다는 인식이 뚜렷하다”면서, “고객이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새로운 수익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롯데면세점은 명동본점에 ‘향(香) 라운지’를 신설해 고객이 직접 향을 조합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신라면세점은 서울에 이어 제주점에 ‘무신사 DF점’을 입점시키면서 패션보다 ‘로컬’과 ‘감성’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쇼핑의 장소’에서 ‘머무는 장소’로의 변환이 시작됐습니다. ■ 이야기로 설계하는 세 가지 전환법 면세의 미래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보다 구체적인 구조 설계에 있습니다. 이야기를 공간, 상품, 관계로 구조화하는 일, 그리고 이를 산업의 체질로 바꾸는 일입니다. 이미 일부 시내면세점들은 로컬 브랜드와의 협업, 체험형 존, 무신사 입점 등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정작 ‘스토리’가 ‘수요’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이야기 설계가 단선적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야기 자체를 구조로 짜야 합니다. 우선 “공간의 전환. 통과형에서 체류형으로.” 공항형 매장은 ‘잠깐의 소비’를 전제로 하지만, 시내면세는 지역을 해석하는 공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관광객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지역의 얼굴’을 보는 곳이 바로 시내면세입니다. 그렇다면 매장은 단순 진열장이 아니라 ‘도시의 쇼룸’이어야 합니다. 지역 작가 전시, 향 체험, 로컬 아트오브제 등을 결합해 소비자에게 ‘구매할 이유’가 아니라 ‘머무를 이유’를 제안해야 합니다. 롯데와 신라가 도심형 면세점에 팝업존을 열어 로컬 브랜드를 큐레이션하는 이유도 이 흐름입니다. 그렇지만 기존 시도가 단발성 이벤트에 그쳤다면, 이제는 지속 가능한 공간 편집력이 필요합니다. 면세점이 아니라 ‘로컬 리테일 스튜디오’로 재설계돼야 합니다. 둘째, “상품의 전환. 로컬의 이야기를 상품화하라.” ‘제주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라산 향, 오름의 색감, 해녀의 숨결처럼 지역의 정서를 감각화한 상품은 명품보다 오래 남는 프리미엄이 됩니다. 다만, 이미 로컬 협업 상품은 시도된 바 있습니다. 신라면세점 제주는 무신사와 손잡고 매장을 선보였지만 아직은 뚜렷한 기념형 소비를 장담할 수준이 아닙니다. ‘지역성’이 상품의 본질이 아니라 ‘마케팅 요소’로 소비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이야기를 브랜드의 정체성에 이식하는 단계가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면세점이 로컬 크리에이터와 공동 기획해 한정판 향수나 액세서리를 만들고 그 제작 과정을 매장 내 영상으로 보여주는 ‘스토리 셀링’ 방식입니다. 상품보다 ‘만드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구조입니다. 셋째, “관계의 전환. 구매 이후의 기억을 연결하라.” 면세점의 진짜 경쟁력은 결제 순간이 아니라 ‘그다음 방문’을 이끄는 능력입니다. 여행 중 찍은 사진이나 후기를 공유하면, 다음 여행 때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제공하는 ‘기억 리워드’ 시스템이 그 예입니다. ■ 기억으로 남는 산업... 그 마지막 문법 송객수수료 중심의 경쟁 구조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고객과의 직접 관계를 설계하는 쪽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앱 기반의 여행-소비 연동형 리워드, 로컬 브랜드와 연계한 후기 보상형 마케팅은 ‘한 번의 구매’를 ‘다음 관계’로 바꾸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면세 산업은 결국 ‘가격의 산업’에서 ‘기억의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가격은 ‘수요’를 일으키지만, 이야기는 ‘관계’를 남깁니다. 이제 면세점이 파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여행이 끝난 뒤에도 남는 감정의 잔상’이어야 합니다. 그 변화의 문법은 제주의 시내면세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고 있습니다. 면세의 끝은 가격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쓰는 주체는 결국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쓰는 이야기가 산업의 생존을 주도합니다.
2025-10-1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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