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장예린의 《HOSTIA》
상처는 때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잘 다듬어진 표정과 눈길을 끄는 옷차림, 빈틈없이 꾸민 외모 속에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과 끝내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이 함께 살아갑니다.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면서, 그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제주 출신 장예린 작가가 오랫동안 그려온 소녀들에게서도 그런 긴장이 감지됩니다. 커다란 눈과 정교한 장식,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놓인 듯한 풍경. 친숙한 소재들이 어우러지지만 어딘가 묘한 불안이 감돕니다. 순수함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은 위태로워 보이고, 고요한 표정에서는 오래 참아온 감정이 읽히기도 합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외모와 그 뒤에 감춰진 감정 사이에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습니다. 장예린이 지난 10일부터 제주시 갤러리 이호에서 선보이고 있는 개인전 《HOSTIA》는 그가 오랫동안 탐색해 온 내면과 외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Hostia’는 라틴어로 희생 제물을 뜻하며, 가톨릭에서는 성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얼굴을 이야기했던 장예린이 이번에는 희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전시를 열었습니다. 아름다움과 상처, 욕망과 두려움,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과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선택이 그 단어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 아름다움이라는 보호막 그 실마리는 2020년 작품 〈Persona〉의 작가노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장예린은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 화장을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장치로 설명했습니다. 사회적 불합리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페르소나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제주 비오톱갤러리에서 개인전 《페르소나》를 열었습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드러내는 얼굴과 역할을 설명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됩니다. 장예린이 그려온 인물들에서는 가면을 필요로 하는 불안과 욕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에는 인정받고 싶은 심리와 타인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자리합니다. 자신을 꾸미는 동안 드러내고 싶은 부분은 강조되고, 감추려는 감정은 그 뒤로 숨습니다. 옷차림과 장신구는 그런 심리를 읽는 단서가 됩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선택한 장식에서 오히려 그 흔적을 짐작하게 됩니다. 소녀라는 형상에도 순수함과 연약함,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회적 기대가 따라붙습니다. 보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인물의 표정에 익숙한 감정을 덧씌웁니다.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볼수록 처음 받았던 인상은 흔들립니다. 누군가는 순수함을 읽고, 누군가는 불안을 느낍니다. 같은 그림 앞에서도 서로 다른 해석이 생겨납니다. 그 차이에는 저마다 살아오며 익힌 판단과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소녀를 바라보던 시선은 어느 순간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 소녀의 곁에 놓인 또 다른 이야기 장예린이 이전 작업에서 반복해 온 소재는 인물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바다와 달, 밤의 풍경과 동물, 일상의 사물도 등장합니다. 익숙한 이미지들이 어우러지면서 기억과 욕망, 애착과 상실이 교차합니다. 이러한 탐색은 제주를 떠나서도 이어졌습니다. 2022년 서울 FFF에서 개인전 《ABRAXAS》를 열었고, 2023년에는 제주도의 수도권 레지던시 파견사업을 통해 경기도 양주 가나아틀리에에서 작업했습니다. 이듬해 서울 인사아트센터 내 제주갤러리에서 열린 결과보고전 《아틀리에, 그 너머》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 전시 소개에서는 소녀 이미지에 기반한 자화상 연작과 함께 배경과 사물을 통해 인간의 양가성과 무의식적 환영을 표현해 온 작업 세계가 조명됐습니다. 눈여겨볼 지점은 자화상이라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출발했지만 그림 속 소녀는 실제 작가의 얼굴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른 인물의 형상을 빌려 스스로를 바라보는 셈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는 기억과 욕망을 한 발 떨어져 살펴볼 여지를 남깁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낯선 인물과 풍경에 옮겨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얻습니다. 관람객은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보탭니다. 같은 바다를 보고도 누군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오래전 떠나온 장소를 생각합니다. 동물에게서 위안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별의 기억을 곱씹을 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기억에서 출발한 이미지는 그렇게 또하나의 시간과 만납니다. 어린아이의 형상에 순수함과 불안, 애착과 두려움이 겹쳐지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녀의 얼굴을 통해 어른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 보호와 희생 사이, 아름다움의 대가 전시 제목 《HOSTIA》를 2020년 작품 〈Persona〉의 작가노트와 나란히 놓으면 ‘보호’와 ‘희생’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가면과, 무언가를 내어주는 행위.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태도를 바꾸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감추기도 합니다. 보호하려는 선택이 자신의 시간과 욕망을 내어주는 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희생은 때로 자발적인 선택이 되고, 때로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을 지키던 방식이 오래 반복되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옭아매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호와 희생이라는 두 단어는 장예린이 오랫동안 다뤄온 상처와 욕망을 새롭게 읽게 합니다. 포스터에는 어린 양을 품에 안은 소녀가 등장합니다. 서양 기독교 미술에서 어린 양은 순결과 희생을 상징해 온 존재입니다. 《HOSTIA》라는 제목과 함께 바라보면 품에 안긴 양은 한층 복합적인 의미를 얻습니다. 양을 감싼 손길에는 애착과 보호의 정서가 느껴집니다. 동시에 희생이라는 제목은 그 관계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시간과 사건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소녀와 어린 양이 만들어내는 장면에는 누군가를 지키려는 애착과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함께 스며 있습니다. 장예린이 이전 작업에서 다뤄온 감정의 양면성을 전시 제목과 연결해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포스터가 제시하는 상징이 실제 전시에서 어떻게 펼쳐질지는 직접 확인할 부분으로 남습니다. 아름다운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감수한 시간, 타인의 기대에 맞추느라 숨긴 욕망,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내어준 것들. 우리가 ‘가면’이라고 부르는 얼굴에는 그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선택한 아름다움이 어느새 그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장예린은 2019년 말부터 2020년 초까지 김만덕기념관에서 열린 《우리 집에 그림 하나》를 비롯해 2020년 《ART VIRUS 20》과 《걸어, 봄》 등에도 참여했습니다. 이후 개인전과 수도권 레지던시를 거쳐 이번 《HOSTIA》로 제주 관객과 다시 만납니다. 전시는 제주문화예술재단의 2026년 청년예술인 성장지원 사업과 연계해 마련됐습니다. 오는 20일까지 제주시 갤러리 이호에서 열리며,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2026-10-16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