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그물은 기억한다… 지하에 걸린 ‘너무 늦지 않은’ 바다
버려진 그물은 바다를 떠나도 바다를 잊지 못합니다. 한때 물살을 가르던 그물은 찢기고 엉킨 채 제주시 도심의 지하로 내려옵니다. 잡기 위해 만들어진 그물은 이번에는 붙잡힌 시간의 표면이 됩니다. 바다와 노동, 소비와 폐기, 자연과 인간이 엉키고설킨 매듭은 갤러리의 벽과 바닥, 천장 사이로 스며 번집니다. 닳은 합판과 자연에서 얻은 안료가 그 곁에 놓이고, 오래 버려졌던 것들은 한 공간 안에서 다시 서로를 밀고 당깁니다. 환경문화예술단체 모다드로가 오는 13일부터 제주시 돌담갤러리에서 기획 단체전 《너무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리》를 엽니다. 이번 전시는 폐그물을 ‘재활용 소재’로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버려진 물건을 보기 좋게 되살리는 방식보다, 그 물건이 지나온 시간과 남겨진 책임을 전시장 한가운데로 끌어옵니다. 전시 기획을 맡은 장영은 폐그물을 주요 재료로 삼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 온 작가입니다. 오는 11일까지 돌담갤러리에서 개인전 《OUR BLUE PLANET》을 열며, 푸른색과 폐그물, 회화와 설치를 오가며 바다와 인간 사이에 남은 흔적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개인전이 폐그물의 시간을 장영의 감각으로 붙드는 자리라면, 이어지는 《너무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리》는 그 문제의식을 모다드로의 공동 창작으로 확장하는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폐그물은 장영의 작업에서 나아가, 서로 다른 작가들의 감각을 한자리로 불러 모으는 매개가 됩니다. 장영, 강연주, 유리, 이제용, 조나단 승준 리, 한희선, 흔적 김규리 등 7명은 각자의 작업을 따로 진열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재료와 감각을 겹치고, 기대면서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환경으로 엮습니다. 푸른 색면은 물길인 듯 흘러내리고, 짙은 매듭은 화면 위로 솟습니다. 흔들의자가 놓인 어두운 공간에서는 빛이 벽을 가르며 번지고, 그림자는 또 하나의 재료가 됩니다. 작은 원과 구멍, 천의 표면과 합판의 결, 종이 위에 남은 노랑과 회백색의 흔적은 전시장을 하나의 느린 생태로 바꿉니다. 작품은 벽에 걸린 결과물이 아니라, 관람자의 몸을 통과시키는 장소가 됩니다. 그물의 매듭, 합판의 결, 안료의 색, 빛이 닿지 않는 틈과 그림자까지 전시 일부로 작동합니다. ■ 전시장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근대 미술관의 익숙한 질서는 작품을 하얀 벽 위에 세우고, 작품과 관람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듭니다. 이른바 화이트 큐브(white cube)의 방식입니다. 모다드로는 그 안전한 거리를 흔듭니다. 작품마다 독립된 자리를 부여하는 대신, 전시공간 전체를 공동 창작의 장으로 활용합니다. 한 작가의 재료는 다른 작가의 작업과 맞닿고, 바닥의 높낮이와 천장의 압박감, 벽면의 결, 관람객이 지나는 동선까지 작업의 조건으로 맞물립니다. 장영의 작업에서 푸른 색은 바다의 풍경보다, 남긴 흔적을 불러냅니다. 흰 여백 사이를 흐르고 끊기다, 그 위에 엉킨 자국을 남깁니다. 멀리서 물길처럼 보이던 화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칠게 쌓인 시간의 층으로 바뀝니다. 유리의 설치는 빛과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입니다. 흔들의자와 러그, 벽을 가르는 색의 투사는 누군가 머물렀거나 막 떠난 자리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환경이란 바깥의 자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습관, 기억, 사라진 몸의 온도까지 포함하는 넓은 장소가 됩니다. 강연주의 작업에서는 종이 위에 남은 노랑과 회백색, 검은 흔적이 낡은 표면으로 떠오릅니다. 선 하나가 화면 위를 가로지르며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는 분리보다 흔들림 쪽으로 기울며 화면에 불안정한 감각을 남깁니다.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을 몇 점 보았는지가 아닙니다. 어느 매듭 앞에서 시선이 멈췄는지, 어떤 표면 앞에서 순간 몸이 느려졌는지, 빛과 그림자가 언제 재료의 성격을 바꾸는지가 더 오래 각인됩니다. 전시장은 중립적인 그릇이 아니라 관계를 일으키는 장소가 됩니다. 작품은 공간에 놓이는 대신, 공간을 다시 짜는 힘으로 움직입니다. ■ 폐그물, 아름답기 전에 불편하다 폐그물은 ‘업사이클링’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보다 더 거친 자리에서 출발합니다. 그물은 바다에서 쓰였고, 버려졌고, 오래 남았습니다. 역할을 잃은 뒤에도 해안과 생태계, 인간의 생활 주변에서 계속 흔적을 남겼습니다. 모다드로는 그 불편함을 지우지 않습니다. 낡고 엉킨 상태, 거칠고 닳은 표면, 매듭 사이에 남은 시간을 전시장 안으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합판과 천연 안료도 같은 방식으로 놓입니다. 자연에서 비롯된 색과 산업의 재료, 쓰임을 다한 것들이 한 공간에서 여과 없이 충돌합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깨끗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외면했던 것을 다시 직시하는 태도에서 생겨납니다. 이 대목에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의 시선을 조심스럽게 빌려올 수 있습니다. 말은 낯설지만 핵심은 어렵지 않습니다. 세계는 인간의 뜻만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물 역시 저마다의 무게와 속도, 냄새와 표면, 놓인 자리로 사건에 끼어듭니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에서 사물에도 힘이 있다고 봤습니다. 음식과 전기망, 쓰레기와 금속처럼 인간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들이 실제로는 세계를 바꾸는 흐름에 참여한다는 관점입니다. 그 시각으로 본다면 폐그물 역시 빈 재료가 아닙니다. 인간이 버린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바다와 생태계, 관람자의 감각을 계속 건드립니다. 전시장 안에 놓인 매듭은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 남긴 시간이 다시 손에 걸리는 순간이 됩니다. 모다드로의 작업은 이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주 바다에서 건너온 그물과 갤러리 지하의 공기, 빛이 닿지 않는 틈, 관람객의 느려진 발걸음 속에서 그 감각을 직접 만나게 합니다. ■ ‘너무 늦지 않았다’는 말, 그 팽팽한 긴장 전시 제목 역시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핵심은 ‘너무’라는 부사에 있습니다. 늦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모든 가능성이 닫혔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안도보다는 긴장을 품고, 위로보다 질문에 더 밀착돼 있습니다. 포스터 속 글자는 또렷하게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입자 사이에서 흩어지고 흔들립니다. 화면 안에서 완전히 붙잡히지 않으면서, 사라지기 직전의 뿌연 감각으로 부유합니다. 전시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기후위기와 생태 훼손을 거대한 경고문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한때 바다에서 쓰였으나, 이후에는 시선 밖으로 밀려났던 것을 관람객의 동선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배경으로만 보아왔는지, 무엇을 쓰고 버린 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나쳤는지, 아직 감각을 되돌릴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남아 있는지 묻게 됩니다. 질문들은 전시장 바깥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돌담갤러리의 지하를 나선 뒤 바로 마주할 수 있는 제주의 바다와 골목, 해안의 폐기물과 오래된 자재는 이전과 같은 풍경으로만 남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다드로의 전시가 자연을 사랑하자는 거창한 선언에 기대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끊어진 감각을 다시 만져보면 어떻겠느냐고, 낮은 목소리로 권합니다. 버려진 그물을 전시장으로 옮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다의 잔해이면서, 인간이 남긴 기록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의 편린입니다. 전시는 19일까지 제주시 중앙로 58 Place1빌딩 지하 1층 돌담갤러리에서 열립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환경문화예술단체 모다드로가 주최하고, 장영이 기획했습니다. 제주자치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후원합니다.
2026-07-09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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