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흘 빈 공간엔 노트북이 켜졌고, 조천리 골목은 러닝 코스가 됐다”... 제주에서 요즘 사람들이 ‘동네의 하루’를 예약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공항에 내리자마자 유명 관광지부터 찾았습니다. 해안도로를 돌고, 이름난 카페를 들른 뒤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흐름이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주 마을 안에서는 조금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관광객들은 바다 앞 카페 대신, 동네 빈 공간을 찾아 노트북을 펼칩니다. 골목길을 달리다가 오래된 팽나무 아래 멈춰 쉬고, 주민들과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렌터카를 타고, 누군가 찾아 다녔던 인기 핫플레이스 중심의 이동 동선보다 “오늘 이 동네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를 먼저 고민하는 분위기입니다. 제주관광공사와 제주자치도는 13일 올해 지정된 ‘제주 마을 여행 전담 여행사 및 크리에이터’들이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고 밝혔습니다. 프로젝트 핵심은 새로운 관광지를 더 만드는 게 아닙니다. 마을 안으로 여행자를 천천히 들어오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숙소와 관광지를 오가는 소비 구조에서 나아가, 지역 생활권 안에서 시간을 쓰고 관계를 맺도록 설계한 방식입니다. ■ 선흘, ‘관광 일정’ 대신 하루 흐름을 만들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입니다. 로컬 크리에이터 기업 ‘잇지제주’는 지난 8일부터 9일까지 선흘2리에서 ‘워크인선흘’을 운영했습니다. 이틀짜리 행사였지만 현장 분위기는 기존 관광 프로그램과 달랐습니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동선을 빠르게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오전 내내 작업을 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골목 안 작은 상점을 자유롭게 둘러봤습니다. 카페 창가에서 화상회의를 하거나, 마을 식당에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이어가는 참가자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서울·경기·인천 등지 참가자들은 선흘2리 내 22개 로컬 파트너 업체와 연결된 스탬프 투어를 통해 마을을 둘러봤습니다. 흥미로운 건 소비 방식이었습니다. 대형 관광지 한 곳으로 몰리는 구조가 아니라, 식당과 카페, 체험 공간, 작은 상점들로 자연스럽게 수요가 퍼졌습니다. 특히 마을 유휴공간을 임시 업무 공간으로 바꾼 ‘노마드 패스(Nomad Pass)’는 참가자 호응이 이어졌습니다. 일과 여행을 분리하기보다, 실제 마을 안에서 하루 리듬 자체를 이어가도록 구성한 게 주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민 이야기를 듣는 ‘선흘 마이크’ 프로그램도 기존 관광 콘텐츠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관광 설명회보다 동네 사랑방 분위기가 더 짙었습니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잠깐 여행 왔다기보다 며칠 이 동네에서 지낸 느낌이었다”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 조천리, 기록 경쟁보다 ‘마을 속도’가 먼저 조천리에서는 러닝이 관광 콘텐츠로 확장됐습니다. 제주 기반 콘텐츠 기업 ‘픽제주’는 지난 9일 조천리 일원에서 로컬 러닝 프로그램 ‘런투조천’을 운영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마을 해설사와 함께 골목을 달리며 조천리 만세운동 이야기를 듣고, 97세 주민이 사는 집 마당 팽나무 아래에서 숨을 골랐습니다. 누군가는 용천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또 오래된 골목 담장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기록을 겨루는 이벤트보다는, 마을 안 호흡을 몸으로 체험하는 흐름이 더 강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전문 러너들이 러닝화 끈 묶는 방법과 보폭 조절까지 직접 설명했습니다. 이런 세밀한 운영과 배려가 참가자 만족도를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프로그램 종료 뒤 진행된 설문에서는 참가자 전원이 조천리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달리러 왔다가 동네 자체가 궁금해졌다”, “여름에 다시 와서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는 응답들이 이어졌습니다. ■ 제주 관광, 이제 ‘체류 방식’을 다시 설계한다 최근 제주 관광시장 안에서는 소비 방식 변화도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관광객 수는 회복세를 보이는데, 정작 현장 상권에서는 “예전처럼 빠르게 돈이 도는 느낌은 아니다”는 말도 계속 나옵니다. 항공료와 체류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여행객들은 더 오래 고민하고, 더 천천히 일정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짧게 둘러보고 떠나는 일정 대신 지역 안에서 시간을 보내려는 분위기도 함께 짙어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공유 오피스와 로컬 클래스, 러닝 프로그램 같은 생활형 콘텐츠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관광지가 아니라 생활권 자체를 경험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주관광공사 관계자는 “최근 관광객들이 지역 삶과 문화를 깊이 경험하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며 “민간이 새로운 로컬관광 모델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습니다. 기존 제주 여행은 유명 장소를 빠르게 돌고 이동하는 일정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마을 안에서는 예전과 다른 풍경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디를 봤는지보다 어느 골목에 오래 머물렀는지, 무엇을 소비했는지보다 그 동네 하루 안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냈는지. 제주 관광은 지금 체류 방식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성장 기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2026-05-13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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