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굶고 버티는 10대 늘어나는 사이… 제주서중 교문 앞에선 ‘백설기 한 조각’이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21일 오전 7시 50분. 제주서중 교문 앞은 평소와 달리 이상할 정도로 분주했습니다. 학생들은 고개 숙여 빠르게 지나가려다, 갑작스레 손에 떡과 식혜가 쥐어지자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이른 아침 공기 속에서 백설기의 고소한 향이 퍼지고, 학부모와 교사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먹고 가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등굣길이 ‘하루의 시작’이라는 사실이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아침 결식률 40%대… 등굣길, ‘기본 생활’의 균열을 드러내다 이날 캠페인은 농협 제주본부와 참사랑실천학부모회, 제주서중 학부모회가 함께 마련한 ‘든든한 아침, 활기찬 하루!’ 올해 마지막 행사였습니다. 준비물은 단출했습니다. 백설기, 식혜, 그리고 응원. 하지만 이 장면이 전하는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질병관리청 조사에서는 청소년 41.1%가 최근 일주일 중 5일 이상 아침을 거른다고 답했습니다. 숫자로 치면, 교실 30명 기준으로 12명 가까이 ‘뱃속을 비운 채 첫 교시를 맞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난히 지친 표정의 아이들이 교문을 지나던 이유가 이 수치와 현장에서 동시에 확인됩니다. 잠 부족, 맞벌이 가정 증가, 불규칙한 생활 리듬이 겹치면서 아침밥은 가장 먼저 사라지는 항목이 됐습니다. 그래서 교문 앞에서 떡을 건네는 어른들의 손길은 과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습니다. “어제도 못 먹었죠?”라고 묻는 대신 “이거 먹어”라며 백설기 하나를 건넬 때 자연스럽게 늦춰지는 아이들의 발걸음. 적어도 ‘오늘을 버틸 힘’이 이곳에서 출발한다는 점 하나만큼은 분명했습니다. ■ 새벽부터 나온 학부모·교사·농협… ‘사람’이 먼저 움직인 하루 현장에는 마지막 행사를 기념해 고우일 제주농협 본부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일찍 도착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참사랑실천학부모회와 제주서중 학부모회도 아이들 등교 시간에 맞춰 한 줄로 섰습니다. 떡을 받아들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학생들, 잠 덜 깬 얼굴로 식혜를 들고 교문을 지나가는 모습, 이를 조용히 지켜보는 교사들까지. 하나하나 선명했습니다. ‘누가’ 이 아이들의 하루를 챙기는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양기봉 교장은 “아침부터 응원을 받는 일 자체가 아이들 마음을 단단하게 바꾼다”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김선미 학부모회장은 “아침밥 챙기지 못하는 집도 많고, 아이들이 스스로 놓치는 경우도 많다”며 “교문 앞에서만큼은 아이들이 비워진 채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 백설기 한 조각의 의미… “지금 한국의 쌀·농업·돌봄 구조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농협이 이 캠페인을 ‘농심천심(農心天心)’ 운동과 연결한 이유 역시도 분명합니다. 한국의 연간 쌀 소비량은 해마다 줄고, 아침을 거르는 청소년은 눈에 띄게 늘고, 가정의 식사 구조는 불안정해졌습니다. 이 세 흐름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아침 한 끼’입니다. 백설기와 식혜는 간식이 아니라, 아이들의 하루를 여는 첫 에너지이자 우리 농업이 학교와 일상 사이에서 존재감을 확보하는 가장 현실적인 접점입니다. 농협 제주본부가 청소년 응원캠페인, 수능 응원, 어르신 점심 나눔, 지역축제 연계행사를 꾸준히 이어온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쌀 소비 확대는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사람이 직접 서서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의미가 쌓인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 작은 행사, 큰 질문… “아침밥은 이제 누가 책임져야 하나” 제주서중 교문 앞에서 1,500명에게 백설기를 건넨 일은 그저 보기 좋은 응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교육·돌봄·농업 구조가 맞닥뜨린 틈새가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었습니다. 아침밥을 챙기지 못하는 집, 바쁜 부모, 피곤한 아이들, 무너진 생활 리듬 그리고 줄어드는 쌀 소비까지. 이 모든 요소가 교문 앞에서 한 번에 맞물렸습니다. 그 공백을 정책도, 예산도 아닌 학교와 학부모, 지역 농협이 먼저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행사는 하나의 질문을 또렷하게 남깁니다. “지금 이 아이들의 첫 끼는 누가 책임지는가.” 그리고 그 답을 가장 빠르게 실천으로 움직인 건 행정이 아니라 지역사회였습니다. ■ 교문 앞, 아이들의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 아침 한 끼가 흔들리는 시대, 교문 앞은 마지막 남은 ‘생활의 경계’입니다. 아이들이 하루를 버틸 힘을 어디서 얻는지, 누가 먼저 손을 내밀고 있는지 가장 정확하게 보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물론, 백설기 한 조각이 거대한 구조를 단숨에 바꾸진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오늘은 빈 배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감각을 직접 전한다는 점에서, 캠페인은 이미 제 역할을 해냈습니다. 제주서중 교문 앞, 올해 마지막 백설기가 남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년, 그리고 그 이후 이 아침을 누가 어떻게 이어갈지는 이제 지역사회가 답해야 할 몫입니다. 이날 현장에서 고우일 제주농협 본부장은 “아이들이 하루를 버틸 힘은 이런 작은 순간에서 시작된다”며 “지역이 먼저 움직이면 학교와 가정, 농업이 다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백설기 한 조각은 결국, 아이들 앞에 지역이 먼저 내민 또 하나의 내일이었습니다.
2025-11-23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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