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6일)은 304명의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 8주기입니다.
JIBS는 당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족인 김순길씨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김순길씨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9반 고(故) 진윤희양의 어머니입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던 김씨는 딸을 잃은 이후 8년째 진상 규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과 세월호 제주기억관의 관장 직을 맡아 더욱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생존자 명단에 우리 아이 이름이 없었다
많은 국민들이 8년 전 세월호 참사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집단적 트라우마가 형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참사의 직접 당사자인 김순길씨는 그 기억이 누구보다 또렷했습니다.
김씨는 "제가 당시에 직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날도 출근을 해서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학교에 우리 아이 친구 엄마한테서 전화가 와서 배가 침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라며, "놀라서 동료들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상황을 알게 됐어요. 어쨌든 금방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나왔었죠"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당시 '전원 구조' 보도는 오보였습니다.
김씨는 "(오보였지만 '전원 구조' 뉴스가 나왔음에도)그래도 상황을 알아보고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학교에 가서 버스로 이동했습니다"라며, "버스에 타서 이동하는 중에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어 "버스로 내려가는 중에 구조된 아이들 명단이 올라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둘째 아이한테 전화를 해서 언니 이름이 있는 확인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서로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라며, "근데 딸아이 이름은 명단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명단에 (가족의)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난리가 났었죠. 그냥 미쳐버리는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진도 팽목항으로 떠나던 그 길이 진상규명을 위한 기나긴 싸움으로 이어질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걸어온 8년
김순길씨는 "진상 규명을 위해 걸어온 매 순간순간 모두 기억이 납니다"라며, "우리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것부터 시작해서 광화문에서 처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청할 때 물대포를 맞아가면서 강제로 진압당한 것까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무슨 집회나 무슨 공청회 8년 동안 안 다녀본 게 없었어요"라며, "특히 세월호 참사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 천만 명의 서명을 받아서 전달했었죠"라고 말했습니다.
김순길씨는 "저희가 활동을 하며 다니다 보면 직접적으로 옆에다 대고 욕도 하고 손가락질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라며 "특히, 놀러 가다 죽었는데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놀러 가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국민이 아닌 건가요. 그런 사람들의 목숨은 아깝지 않냐구요"라며, "똑같은 목숨이죠. 나라를 구하다 죽은 사람이나, 일을 하다 죽은 사람이나, 놀러 가다 죽은 사람이나 같은 생명이고 모두 소중한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요. 그럼 놀러가다 죽은 사람들은 진상규명이 필요 없는 건가요. 왜 죽었는지 왜 그런 사고가 났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세월호 참사 이후 1기 4·16 세월초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정부의 무수한 방해로 강제 해산됐습니다"라며, "다시 2기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오는 6월 10일 종료가 되는데, 사참위에 성역 없는 조사를 해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조사하기 위해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국가기관이 제1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방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공모하고 실행했다'는 조사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당시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로 1기 세월호 특조위는 2015년 1월 1일부터 2016년 6월 30일까지 활동을 하다가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한 채 해산됐습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딸 사진
김순길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총 세 장입니다. 세 장의 사진 전부는 딸 윤희양입니다.
김순길씨는 "우리 윤희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것을 찾아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교적 담담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파서 차마 꺼내보지 못한 자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윤희양이 참사 당시 갖고 있던 휴대전화 속 내용물이었습니다.
김씨는 "윤희가 참사 당시에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바다에서 건졌다. 2~3년 전에 휴대전화를 포렌식해서 그 안에 있는 파일들도 USB로 받았는데 아직까지 못 열어봤습니다. 차마 못 열어보겠더라고요. 마음이 너무 아플까봐"라고 말했습니다.
윤희 방 만들어주려고 이사
윤희양은 원래 동생과 함께 방을 사용했습니다.
윤희양이 가족 곁을 떠난 이후 어머니 김순길씨는 윤희의 방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사까지 하게 됩니다.
김씨는 "원래는 윤희가 동생과 같은 방을 썼는데 윤희방을 잃고 난 후 윤희의 방을 따로 만들어줘야 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라며 "2015년 12월엔가 이사를 해서 방을 만들어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방 안에는 윤희 책상하고 사진들을 넣어 놓았죠"라며 "윤희방의 문은 항상 열어놓아요. 아직도 언젠가 짠하고 나타날 거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가 손수 싸줬던 김밥을 가장 좋아했던 아이
윤희양의 생일은 10월 24일입니다.
김순길씨는 윤희양의 생일이 되면 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립니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김밥입니다.
김씨는 "윤희 생일에는 윤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서 만나러 갑니다. 윤희는 많이 먹진 않는데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어요"라며 "딱 하나 오이는 냄새가 싫어서 먹지 않았죠"라고 딸 아이에 대해 회상했습니다.
이어 "윤희는 특히 내가 만든 김밥을 좋아했습니다. 나도 직장을 다녔지만 윤희가 소풍 같은 걸 갈 때면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손수 싸서 보냈습니다. 바쁘다고 사서 보내지 않았죠"라며 "그러면 윤희가 돌아와서 친구들이 엄마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 생일 때 김밥도 싸가지고 가고 그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어서 빨리 잊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
김순길씨는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이런 말 들으면 아프죠. 어떻게 빨리 잊어요"라며, 그걸 빨리 잊으라고 하는 사람은 본인은 빨리 잊을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차라리 옆에 있어 주는 게 낫지. 그냥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라며, "우리가 아이를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는데 어떻게 빨리 잊으라는 얘기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라는 건 어쨌든 우리가 왜 이런 배가 침몰했고, 왜 우리 아이를 보호하지 않았는지 아는 것"이라며, "이 원인을 밝히고 나서야 우리가 충분히 아이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살겠죠. 어떻게든. 근데 그걸 굳이 그렇게 옆에서 위한 답시고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라며, "그렇게 해서 이게 빨리 이어지고 빨리 아물 수가 있겠냐고요. 그건 본인이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라고 설명했습니다.
세월호 이후는 달라져야 합니다
김순길씨는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건 맞지만, 아직도 변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씨는 "제도적으로 조금씩 바뀌긴 한 거 같은데, 뚜렷하게 변화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라며, "아직도 여러 가지 재난 참사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건물이 무너지거나 산불도 크게 나고 노동현장도 마찬가지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형 참사들이 났을 때 아직도 바로바로 조치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는 게 화가 납니다"라며, "그쪽으로 예산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것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저는 많은 분들이 아직도 잊지 않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기억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희생된 304명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생각해요"라며,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그건 어른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도적으로 규칙을 어겨가면서 했던 것들을 다 눈감아줬기 때문이잖아요. 이윤,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어기고, 생명보다 돈을 위하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미안함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이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외쳤던 거고요. 아직 이런 분들이 옆에서 함께 남아 버텨주고 있는데 이것이 가장 감사한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윤희양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김순길씨는 "가장 먼저 꼭 안아주고 싶고요. 안아주고 싶고, 그리고 어쨌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말, 그리고 니가 엄마 딸이어서 너무너무 행복했었다 정말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세월호 참사는 지난 2014년 4월 16일 경기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군 맹골수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입니다. 당시 승선자 476명 가운데 304명이 숨졌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 중 5명은 현재까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실종상태입니다.
진실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가운데 법적 처벌은 받은 사람은 당시 구조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이 확정된 해경 김 모 정장이 유일합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JIBS는 당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족인 김순길씨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김순길씨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9반 고(故) 진윤희양의 어머니입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던 김씨는 딸을 잃은 이후 8년째 진상 규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과 세월호 제주기억관의 관장 직을 맡아 더욱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생존자 명단에 우리 아이 이름이 없었다
많은 국민들이 8년 전 세월호 참사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집단적 트라우마가 형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참사의 직접 당사자인 김순길씨는 그 기억이 누구보다 또렷했습니다.
김씨는 "제가 당시에 직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날도 출근을 해서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학교에 우리 아이 친구 엄마한테서 전화가 와서 배가 침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라며, "놀라서 동료들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상황을 알게 됐어요. 어쨌든 금방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나왔었죠"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당시 '전원 구조' 보도는 오보였습니다.
김씨는 "(오보였지만 '전원 구조' 뉴스가 나왔음에도)그래도 상황을 알아보고 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학교에 가서 버스로 이동했습니다"라며, "버스에 타서 이동하는 중에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어 "버스로 내려가는 중에 구조된 아이들 명단이 올라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둘째 아이한테 전화를 해서 언니 이름이 있는 확인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서로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라며, "근데 딸아이 이름은 명단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명단에 (가족의)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난리가 났었죠. 그냥 미쳐버리는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진도 팽목항으로 떠나던 그 길이 진상규명을 위한 기나긴 싸움으로 이어질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해 걸어온 8년
김순길씨는 "진상 규명을 위해 걸어온 매 순간순간 모두 기억이 납니다"라며, "우리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것부터 시작해서 광화문에서 처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청할 때 물대포를 맞아가면서 강제로 진압당한 것까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무슨 집회나 무슨 공청회 8년 동안 안 다녀본 게 없었어요"라며, "특히 세월호 참사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 천만 명의 서명을 받아서 전달했었죠"라고 말했습니다.
김순길씨는 "저희가 활동을 하며 다니다 보면 직접적으로 옆에다 대고 욕도 하고 손가락질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라며 "특히, 놀러 가다 죽었는데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놀러 가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국민이 아닌 건가요. 그런 사람들의 목숨은 아깝지 않냐구요"라며, "똑같은 목숨이죠. 나라를 구하다 죽은 사람이나, 일을 하다 죽은 사람이나, 놀러 가다 죽은 사람이나 같은 생명이고 모두 소중한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요. 그럼 놀러가다 죽은 사람들은 진상규명이 필요 없는 건가요. 왜 죽었는지 왜 그런 사고가 났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세월호 참사 이후 1기 4·16 세월초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정부의 무수한 방해로 강제 해산됐습니다"라며, "다시 2기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오는 6월 10일 종료가 되는데, 사참위에 성역 없는 조사를 해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조사하기 위해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국가기관이 제1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방해하고 통제하기 위해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공모하고 실행했다'는 조사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당시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로 1기 세월호 특조위는 2015년 1월 1일부터 2016년 6월 30일까지 활동을 하다가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한 채 해산됐습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딸 사진
김순길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총 세 장입니다. 세 장의 사진 전부는 딸 윤희양입니다.
김순길씨는 "우리 윤희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것을 찾아 사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교적 담담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파서 차마 꺼내보지 못한 자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윤희양이 참사 당시 갖고 있던 휴대전화 속 내용물이었습니다.
김씨는 "윤희가 참사 당시에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바다에서 건졌다. 2~3년 전에 휴대전화를 포렌식해서 그 안에 있는 파일들도 USB로 받았는데 아직까지 못 열어봤습니다. 차마 못 열어보겠더라고요. 마음이 너무 아플까봐"라고 말했습니다.
윤희 방 만들어주려고 이사
윤희양은 원래 동생과 함께 방을 사용했습니다.
윤희양이 가족 곁을 떠난 이후 어머니 김순길씨는 윤희의 방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사까지 하게 됩니다.
김씨는 "원래는 윤희가 동생과 같은 방을 썼는데 윤희방을 잃고 난 후 윤희의 방을 따로 만들어줘야 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라며 "2015년 12월엔가 이사를 해서 방을 만들어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방 안에는 윤희 책상하고 사진들을 넣어 놓았죠"라며 "윤희방의 문은 항상 열어놓아요. 아직도 언젠가 짠하고 나타날 거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가 손수 싸줬던 김밥을 가장 좋아했던 아이
윤희양의 생일은 10월 24일입니다.
김순길씨는 윤희양의 생일이 되면 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립니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김밥입니다.
김씨는 "윤희 생일에는 윤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서 만나러 갑니다. 윤희는 많이 먹진 않는데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어요"라며 "딱 하나 오이는 냄새가 싫어서 먹지 않았죠"라고 딸 아이에 대해 회상했습니다.
이어 "윤희는 특히 내가 만든 김밥을 좋아했습니다. 나도 직장을 다녔지만 윤희가 소풍 같은 걸 갈 때면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손수 싸서 보냈습니다. 바쁘다고 사서 보내지 않았죠"라며 "그러면 윤희가 돌아와서 친구들이 엄마 김밥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래서 생일 때 김밥도 싸가지고 가고 그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어서 빨리 잊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
김순길씨는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이런 말 들으면 아프죠. 어떻게 빨리 잊어요"라며, 그걸 빨리 잊으라고 하는 사람은 본인은 빨리 잊을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차라리 옆에 있어 주는 게 낫지. 그냥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라며, "우리가 아이를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는데 어떻게 빨리 잊으라는 얘기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라는 건 어쨌든 우리가 왜 이런 배가 침몰했고, 왜 우리 아이를 보호하지 않았는지 아는 것"이라며, "이 원인을 밝히고 나서야 우리가 충분히 아이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살겠죠. 어떻게든. 근데 그걸 굳이 그렇게 옆에서 위한 답시고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다"라며, "그렇게 해서 이게 빨리 이어지고 빨리 아물 수가 있겠냐고요. 그건 본인이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라고 설명했습니다.
세월호 이후는 달라져야 합니다
김순길씨는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건 맞지만, 아직도 변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씨는 "제도적으로 조금씩 바뀌긴 한 거 같은데, 뚜렷하게 변화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라며, "아직도 여러 가지 재난 참사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건물이 무너지거나 산불도 크게 나고 노동현장도 마찬가지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형 참사들이 났을 때 아직도 바로바로 조치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는 게 화가 납니다"라며, "그쪽으로 예산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데 말이죠. 이런 것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저는 많은 분들이 아직도 잊지 않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기억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희생된 304명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생각해요"라며,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그건 어른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도적으로 규칙을 어겨가면서 했던 것들을 다 눈감아줬기 때문이잖아요. 이윤,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어기고, 생명보다 돈을 위하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미안함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이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외쳤던 거고요. 아직 이런 분들이 옆에서 함께 남아 버텨주고 있는데 이것이 가장 감사한 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윤희양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김순길씨는 "가장 먼저 꼭 안아주고 싶고요. 안아주고 싶고, 그리고 어쨌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는 말, 그리고 니가 엄마 딸이어서 너무너무 행복했었다 정말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세월호 참사는 지난 2014년 4월 16일 경기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군 맹골수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입니다. 당시 승선자 476명 가운데 304명이 숨졌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 중 5명은 현재까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실종상태입니다.
진실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가운데 법적 처벌은 받은 사람은 당시 구조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이 확정된 해경 김 모 정장이 유일합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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