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멈춰 바다로, 숨을 찾아 설산으로”… 양종훈이 이어놓은 두 극, 《극여극》
꽃이 사라진 자리, 시간이 남았다… 임경아가 뜯어낸 ‘부재의 구조’
“제주를 떠난 화가는, 제주를 놓지 않았다”…100년 뒤 다시 보는 양인옥의 빛
[자막뉴스] 전국체전 한 달여 앞두고...'아직 공사 중'
"호르무즈 파병 반대.. 굴종외교이자 주권 포기" 제주서도 '반전' 목소리
명함에 '수중공사업' 버젓이.. 나랏돈 들인 양식장 공사 맡은 무등록 업체들 적발
“제주를 떠난 화가는, 제주를 놓지 않았다”…100년 뒤 다시 보는 양인옥의 빛
어두운 실내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몸을 숙인 사람, 고개를 돌린 사람, 무언가를 향해 손을 내민 아이. 창을 통과한 빛이 얼굴과 손등, 옷자락에 닿고 갈색과 검정이 짙게 깔린 바탕에서 몇몇 형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빛의 화가’라는 익숙한 수식보다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양인옥(梁寅玉·1926~1999)의 그림은 처음부터 환하지 않았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서양화를 익힌 뒤 호남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화가는 짙고 무거운 색조에서 출발해 수십 년에 걸쳐 밝고 유연한 색과 붓질로 옮겨갔습니다. 인물과 누드, 한라산과 항구, 과수원과 바다를 오가며 이어온 화업이 탄생 100년을 맞아 다시 제주에 펼쳐집니다. 오는 1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제주돌문화공원 갤러리 누보에서 열리는 양인옥 탄생 100주년 특별전 《The Texture of Light-빛의 질감》입니다. 1950년대 초기작과 1970년대 작품을 비롯해 인물, 누드, 자연을 다룬 시기별 작업이 함께 나옵니다. 후기의 화려한 색에 가려 상대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초기작까지 나란히 걸리면서 양인옥 회화의 출발과 변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색채의 양인옥’ 이전, 짙고 단단했던 후기 작품을 먼저 떠올린다면 1950년대 그림은 적잖이 낯설 수 있습니다. 옷을 입은 여인과 일상의 남녀가 등장하고 갈색과 검정 등 낮은 색조가 깊숙이 깔리는데, 탄탄한 데생을 토대로 어둠 속에서 밝은 부분을 끌어올리며 형태를 세운 흔적이 선명합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 색과 붓질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초반에는 따뜻한 난색 계열의 피부와 대담한 터치가 힘을 얻고, 후반으로 갈수록 푸른 기운을 띤 회색조와 한결 가벼운 붓질이 자리를 넓혀갑니다. 1981~1982년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그랑 드 쇼미에르’에서 회화를 연수한 이후 나타난 변화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누드에서는 색과 형태가 한층 정제됩니다. 초기와 후기를 함께 놓으면 변화의 폭은 더욱 또렷합니다. 후기의 밝은 색채는 어느 시점 갑자기 등장한 결과라기보다 짙은 색층과 견고한 형태 감각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다듬어진 화법에 가깝습니다. 전시 제목 《The Texture of Light》 역시 이런 흐름에서 읽힙니다. 양인옥의 빛은 물감의 두께와 붓질에서 생겨났습니다. 색을 쌓고 덧입히는 방식에 따라 피부와 바다, 산과 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얻었고, 자연을 옮기는 색과 붓의 움직임도 시기마다 달라졌습니다. ■ 캔버스부터 만들어야 했던 시절… ‘질감’에 남은 시간 1950년대 작품에는 미술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없었던 시대의 사정도 배어 있습니다. 관련 연구에는 양인옥이 캔버스를 구하기 어려워 광주 송정리 미군부대에서 나온 두꺼운 천을 마련한 뒤 양잿물에 삶아 부드럽게 만들고 직접 틀에 씌워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흰색 물감을 만들고 목탄을 구워 스케치 재료로 사용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와 함께 무엇에 그릴 것인가까지 해결해야 했던 때입니다. 천을 손질하고 바탕을 만들고 물감을 올리는 과정 자체가 작업이었고, 초기작에 남은 두꺼운 색과 거친 표면 역시 당시의 제작 환경과 떼어 보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질감’은 붓질의 효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재료를 마련하고 손질한 흔적, 색을 밀어 올리고 다시 덧댄 과정까지 그림에 새겨져 있습니다. 1950년대의 묵직한 색층과 후기의 가벼워진 붓놀림을 나란히 보면 한 화가가 재료를 다루는 방식까지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질감에는 기법뿐 아니라 작업을 지속해온 세월도 함께 남았습니다. ■ 제주에서 일본으로, 다시 호남으로… 화가를 만든 이동 양인옥은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3살이던 1938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시나노바시미술연구소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사이토 요리와 구루미사와 겐토에게 배운 뒤 1947년 졸업해 귀국했습니다. 귀국 뒤에는 진도농업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목포여중, 해남중·고교, 광주여중, 목포상고, 광주제일고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목포교육대학과 목포대학교를 거쳐 호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총장도 지냈습니다. 작가로 이름을 알린 무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전이었습니다. 1963년 제1회 목우회공모전 대상을 받은 데 이어 1965년 제14회 국전 국무총리상, 이듬해 제15회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고 이후 국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활동했습니다. 1979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르 살롱’에 작품을 냈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역대 국전 수상작가전》과 《한국의 자연전》, 《현대미술 초대전》 등에도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1991년 금호예술상, 1996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으며 1998년 제7회 오지호미술상을 수상했습니다. 1999년 6월 향년 74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양인옥을 설명할 때 ‘제주 출신’과 ‘호남 화단’이라는 표현이 함께 따라붙는 까닭도 이런 이력에 있습니다. 출생지는 제주였지만 교육과 창작 활동의 중심은 호남이었고, 일본에서 배운 서양화를 바탕으로 진도와 목포, 광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국전과 전국 단위 전시를 오갔습니다. 어느 한 지역의 이름만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행보입니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작가들이 여러 지역에 정착해 학교와 대학에서 후학을 길렀고, 국전과 지역전을 오가며 각지의 화단을 일궜습니다. 양인옥의 생애 역시 제주에서 일본을 거쳐 호남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 지역미술의 한 흐름과 맞물립니다. ■ 인체와 자연 사이… 같은 손이 찾아낸 형태 양인옥의 화업에서 인체는 중요한 축입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누드는 작고하기 전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가는 굴곡과 피부 위 명암, 넓은 면을 나누는 방식에는 인체를 하나의 구조로 바라보는 시선이 배어 있습니다. 시기마다 색과 표현법은 달라졌지만 몸에 대한 탐구는 1980년대 초부터 말년까지 계속됐습니다. 산과 바다, 항구와 과수원도 오래 그렸습니다. 강한 명암 대비와 대담한 붓질을 즐겨 사용했고, 수평 구도로 안정감을 잡으면서 일부 작품에는 S자형 구도를 끌어들여 시선을 안쪽으로 이끌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햇살을 받은 자연이 보다 밝고 선명한 색으로 나타납니다. 1978년작 〈제주시 사라봉〉도 빼놓기 어렵습니다. 한국은행이 소장한 이 작품에서는 짙푸른 바다와 절벽, 흰 포말이 강한 대비를 이루며 사라봉 일대의 인상을 압축합니다. 호남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지만 제주의 산과 바다는 여러 차례 캔버스로 돌아왔습니다. 1965년 목포와 제주에서 개인전을 연 데 이어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전시를 이어갔고, 1981년에도 제주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한라산과 바다, 중산간과 초가 등 고향에서 익힌 형태와 색은 긴 작업 과정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몸의 굴곡과 산의 능선, 피부의 명암과 햇빛을 받은 들판을 다루는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재는 달라도 형태를 붙잡고 색을 쌓아가는 방식에서 작가 특유의 조형 감각을 드러냅니다. ■ 탄생 100년, 다시 놓이는 양인옥의 자리 2011년 제주에서는 양인옥을 다시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가 열렸습니다. 당시 유족 소장품과 제주에서 발굴된 작품 등 65점이 한자리에 나왔습니다. 호남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제주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양인옥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조명한 자리였습니다. 15년이 흐른 올해는 탄생 100주년입니다. ‘빛의 화가’, ‘색채의 연금술사’, ‘호남 화단의 거목’ 등 여러 수식이 이미 양인옥의 이름을 따라다닙니다. 이번 전시는 1950년대 초기작과 1970년대 작품까지 불러내며 후기의 강렬한 색채에 가려졌던 양인옥 회화의 출발을 다시 꺼내놓습니다. 개막 행사는 19일 오후 4시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합니다.
2026-09-0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자막뉴스] 전국체전 한 달여 앞두고...'아직 공사 중'
전국체육대회 제주 승마장 / 오늘(7일) 오전 전국체육대회 승마 경기가 열릴 제주 승마장입니다. 자재들이 곳곳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건물 골조도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체전을 한 달여 앞두고 여전히 공사가 한창입니다. 현재 경기장은 완공됐지만 마방을 비롯한 부대시설은 85%가량 진행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제주자치도는 당초 승마장 공사를 지난 6월 30일 마무리할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권민지 기자 "완공일이 8월 말로 한 차례 늦춰진 데 이어, 이달 18일까지로 또 한 번 미뤄졌습니다." 전국체전 승마 경기는 다음 달 16일부터 18일까지 치러질 예정입니다. 공식 경기를 한 달여 앞두고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인 겁니다. 12년 전 제주 전국체전 당시에도 도내 승마장 시설 미흡 등의 이유로 인천에서 경기가 개최된 만큼 우려는 커지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완공되더라도 대한승마협회의 승인을 제때 얻을 수 있을지도 과제입니다. 이에 대해 제주도는 시설 공사 초기 단계부터 승마협회와 협의를 하면서 진행해 온 만큼 승인 받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공사가 늦어진 데 대해 제주도는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현재 승마 경기장 공사 비용 50여억 원은 제주도와 제주대학교가 나눠서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 회계는 1월에 시작되고 제주대학교 회계는 3월부터 시작되다 보니, 비용 투입에 2개월 이상 격차가 발생해 공사 진행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김동옥 / 제주자치도 전국체전기획단 체전시설팀장 "9월 18일까지 제주대학교 승마장 시설 확충 사업을 최종 마무리하고요. 제주에서 12년 만에 개최되는 체전인 만큼 선수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도록..." 하지만 제주도와 도급 업체 간 서류상 협의된 공사 기간은 10월 중순까지인 것으로 파악되면서, 제주도가 못 박은 공사 일정이 정상적으로 지켜질지 우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JIBS 권민지입니다. (영상취재 오일령)
2026-09-07 제주방송 권민지 (kmj@jibs.co.kr) 오일령 (reyong510@naver.com) 기자

꽃이 사라진 자리, 시간이 남았다… 임경아가 뜯어낸 ‘부재의 구조’
2년 전 임경아의 화면에는 꽃이 있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고 피었다 시드는 꽃, 물 위에서 번지는 색과 빛에 반응해 남겨진 형상 사이로 감정이 흘렀습니다. 화면을 다 채우지 않은 여백에는 보는 사람의 기억이 들어설 자리도 있었습니다. 지금 임경아의 작품 앞에서는 풍경이 사뭇 달라집니다. 꽃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색도 뒤로 물러났습니다. 대신 삼베와 닥펄프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눌리고 엉기고 굳은 흰 섬유와 뜯겨나간 가장자리, 틈으로 드러난 바탕을 따라가다 보면 덜 남은 곳에서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이 읽힙니다.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부재의 구조(The Structure of Absence)》가 13일 제주시 연북로 갤러리 애플에서 열립니다. ‘사라진 이후에도 무엇이 남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기억은 흐려지고 존재는 사라지지만, 함께 지나온 시간과 감각까지 말끔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작업은 시작됐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걷어낸 뒤 무엇이 남는가를 봅니다. 삼베 위에 닥펄프를 쌓고 누른 뒤 다시 벗겨냅니다. 채우는 행위와 비워내는 행위가 한 화면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 그리지 않은 곳이 아니라, 지나간 곳 삼베와 닥펄프는 바탕과 재료라는 익숙한 관계에만 놓이지 않습니다. 쉽게 해체되지 않는 삼베의 결 위에 닥펄프를 쌓고 압력을 가한 뒤 일부를 벗겨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같은 손의 움직임을 거쳐도 표면은 같은 결과를 내놓지 않습니다. 닥섬유가 엉겨 두툼하게 솟고 어떤 곳은 눌려 얇아집니다. 갈라진 틈에서는 섬유가 빠져나오고, 떨어지다 만 조각은 경계에 매달립니다. 멀리서 하나의 흰 면처럼 읽혔던 작품은 거리를 좁힐수록 여러 층을 드러냅니다. 돌출된 펄프 끝에 빛이 걸리고 움푹 팬 곳에는 그늘이 생깁니다. 보는 위치를 조금 옮기면 앞에서는 잠겨 있던 결이 나타납니다. 색이 물러난 자리를 물질의 높낮이와 빛이 채웁니다. 무엇을 닮게 그리지 않았는데도 표면에서는 꽤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압착과 침전, 응축과 이완은 제작 과정에서 지나간 흔적인 동시에 작품을 이루는 형식이 됩니다. 시간을 묘사하는 대신, 시간이 재료에 직접 눌러앉게 한 화면입니다. ■ 뜯겨나간 곳에서 오히려 보이는 것 흰 닥펄프가 화면 중간에서 크게 떨어져나간 작업 앞에서는 시선이 한 번 꺾입니다. 위쪽에는 펄프가 두텁게 남아 있지만 아래로 내려가면서 회색 바탕이 넓게 열립니다. 둘 사이에는 반듯한 선 대신 찢어지고 갈라진 경계가 있고, 풀린 섬유 몇 가닥은 아래로 길게 늘어집니다. 임경아는 비어버린 곳을 다시 메우거나 뜯긴 가장자리를 말끔하게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를 보완하기보다 덜 남았다는 사실 자체를 일종의 조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는 흰 닥펄프의 질감을 좇던 눈이 어느 순간 회색 면에 머뭅니다. 비어 있는 부분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부터 빈 곳과 무엇인가 사라져 비게 된 곳 사이에 놓인 시간의 차이가 보입니다.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면 이전은 없습니다. 무언가 사라져 비었다면 그 자리에는 ‘있었던 시간’이 따라붙습니다. 오래 걸어둔 액자를 벽에서 떼어낸 뒤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그림은 없어졌는데 햇빛에 노출된 벽과 가려졌던 벽의 색은 다르고, 못을 뽑은 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남습니다. 정작 액자가 사라진 다음에야 차지했던 면적이 더 정확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부재의 구조》에서 말하는 부재 역시 ‘아무것도 없음’과는 조금 다릅니다. 비어서 생긴 자리가 아니라, 있었기 때문에 생긴 자리입니다. ■ 2년 전의 ‘여백’을 다시 바라보다 2024년 첫 개인전 《전이된 어떤 심상》에서도 임경아는 비어 있는 곳을 작업 안에 남겼습니다. 당시 시선을 이끌었던 것은 꽃이었습니다. 마블링으로 흘려보낸 색의 우연과 시아노타입(Cyanotype)으로 붙잡은 꽃의 실루엣을 통해 삶과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을 살폈고, 곳곳의 여백에는 관객이 자신의 기억을 포개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빈 곳과 지금의 빈 곳은 닮았지만 같지 않습니다. 2년 전 여백에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작가가 다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다른 감정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부재의 구조》에서 비어 있는 곳은 이미 무언가를 한 차례 겪었습니다. 붙어 있던 것이 떨어지고 압력을 받았던 표면이 달라졌으며, 일이 지나간 다음의 상태가 남았습니다. 여백이 가능성을 품었다면, 지금의 부재는 이전을 품고 있습니다. 두 시점을 한 줄의 발전 과정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사이에는 또 다른 작업과 시간이 있었고, 예술가의 궤적을 앞뒤가 반듯한 직선으로 정리하는 순간 오히려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2024년의 화면과 지금의 화면을 포개놓으면 대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비어 있는 곳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전에는 그곳에 무엇이 들어올 수 있는지를 바라봤다면 이번에는 무엇이 지나간 뒤 자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직시합니다. 같은 ‘빈 곳’을 바라보면서도 시선은 가능성에서 잔존으로, 채워질 시간에서 지나간 시간으로 옮겨갑니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이 시선의 이동이 더 눈에 밟힙니다. ■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동안, 재료도 제 시간을 만든다 삼베와 닥펄프의 관계에서는 작가의 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닥펄프를 놓고 누르고 벗겨내는 행위는 작가의 몫입니다. 그렇지만 젖은 펄프에서 수분이 빠지고 섬유가 수축하며 삼베와 엉기는 과정까지 손이 온전히 지휘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부분은 강하게 붙어 버티고 다른 부분은 떨어집니다. 뜯어낸 뒤에도 미세한 섬유가 남습니다.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동안 재료 역시 제 성질을 밀어붙입니다. 인간만을 의미 생산의 중심에 두지 않고 물질 자체의 작용과 역량을 함께 살피는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의 시선을 잠시 가져올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부재의 구조》를 특정 이론의 예증으로 읽으면 작품은 오히려 좁아집니다. 눈앞의 표면이 더 구체적입니다. 떼어냈지만 전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닥펄프가 사라진 뒤에도 삼베는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붙어 있던 섬유가 남고 표면은 뜯겼으며, 눌렸던 결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손이 행위를 끝내도 재료는 지나간 일을 제 몸에서 지우지 않습니다. ■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물질의 이야기는 여기서 사람의 시간과 묘하게 겹칩니다. 사람은 지나온 모든 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한때 가까웠던 사람의 얼굴이 어느 날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을 수 있고, 나눴던 말의 순서가 흐려지거나 당시 그렇게 절실했던 감정조차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기억은 꽤 많은 것을 흘려보내면서 앞으로 갑니다. 그렇다면 기억에서 사라진 것과 삶에서 사라진 것은 같은 의미일까. 누군가에게 배운 말투를 여전히 쓰고, 오래전에 생긴 습관을 이유도 모른 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취향이나 특정한 순간 먼저 반응하는 몸에도 출처를 잊은 시간이 끼어 있을지 모릅니다. 《부재의 구조》 앞에서는 이런 생각이 관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삼베에서 닥펄프를 벗겨낸 자리에 물리적인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펄프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처음의 삼베가 아닙니다. 사라진 것이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다른 자리를 만들어놓고 사라진 셈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부재’ 못지않게 ‘구조’라는 단어가 중요해집니다. 존재하는 것들만 서로 관계를 맺어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 역시 주변을 바꾸고 이전과는 다른 배열을 남깁니다. 부재에도 모양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꽃이 사라진 뒤, 사람의 시간이 보인다 2년 전 화면에서는 꽃이 흔들렸습니다. 색이 번졌고 여백은 그 사이에서 숨을 쉬었습니다. 지금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감정을 대신 말해주던 형상도 거의 사라졌고, 재료의 결에 새겨진 압력과 수축, 파열과 잔여가 자리를 차지합니다. 형상이 물러난 자리에서 사람의 시간은 도리어 가까워집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대상이 사라진 만큼 관객의 기억이 들어설 폭은 넓어집니다. 상실의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재의 구조》는 누가 떠났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슬픔이나 위로의 방향도 미리 정해두지 않습니다. 붙은 곳과 떨어진 곳, 눌린 곳과 솟은 곳, 드러난 바탕과 찢어진 경계가 눈앞에 놓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눈은 비어 있는 면으로 옮겨가고, 어느 순간 그곳에 앞서 존재했을 시간을 더듬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시작된 시선은 이쯤에서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기억에서 이미 희미해진 시간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까지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면 ‘없다’는 말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2년 전 임경아는 흔들리는 꽃을 따라 감정의 결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직접 그리지 않습니다. 삼베 위에 닥펄프를 쌓고 누른 뒤 다시 걷어내면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대신, 지나간 시간이 바꾸어놓은 자리를 남깁니다. 《부재의 구조》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없음’ 자체와는 조금 다릅니다. 한때 존재했던 것이 사라진 뒤에도 다른 형태로 남아 있는 어떤 방식입니다. 꽃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 시간이 남았습니다. 전시는 19일까지 이어집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후원합니다.
2026-09-07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명함에 '수중공사업' 버젓이.. 나랏돈 들인 양식장 공사 맡은 무등록 업체들 적발
명함이나 사업자등록증에 허위로 '수중공사업'을 기재한 채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금이 투입되는 양식장 현대화사업 공사를 맡아온 무등록 업체들이 해경에 적발됐습니다. 제주지방해양경찰청은 건설산업기본법 위반 혐의로 무등록 수중공사업체 3곳을 적발했다고 오늘(7일) 밝혔습니다. 해경 수사 결과, 이들 업체는 수중공사업 등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3년간 제주지역 지자체의 '양식시설 현대화사업' 관련 공사 12건을 발주받아 불법 시공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파악된 공사 규모는 모두 약 13억 원에 달합니다. 이들은 공사 과정에서 명함과 사업자등록증 등에 '수중공사업'이라고 허위로 기재해 적법한 자격을 갖춘 업체인 것처럼 행세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특히 수중공사의 경우 대부분의 작업이 수면 아래에서 이뤄져 발주자인 양식업자나 일반인이 시공의 적정성을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것으로 해경은 보고 있습니다. 수중공사업 등록을 위해서는 관련 법령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능력을 비롯해 시설과 장비, 자본금 등의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해경은 무등록 업체와 공사계약을 체결할 경우 적정한 기술과 장비를 갖췄는지 확인하기 어려워 공사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과 피해 보상 등 사후 처리도 복잡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해경 관계자는 "최근 고수온 피해 등으로 양식어가에 대한 국가 지원사업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지원사업에 수반되는 공사가 적법하고 안전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무등록 건설업이나 각종 수중공사 불법 하도급 등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단속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해경은 무등록 업체에 공사를 발주한 양식장 가운데 5곳이 당초 허가받은 면적을 초과해 공유수면을 점·사용한 정황도 포착하고 별도의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2026-09-07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