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지키는 어미, 난간에 선 새끼”.. 도심 속 매 가족이 말했다
전봇대 꼭대기에서 주변을 살피는 어미, 아파트 난간에 매달린 어린 새끼. 서귀포 도심에서 시민 제보로 매의 번식 장면이 확인됐습니다. 한라산에서 검독수리 둥지가 77년 만에 발견된 데 이어, 이번에는 인간 생활권 속 맹금류의 번식이 드러나며 공존의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고 있습니다. ■ 제보가 기록한 장면 17일 오후 6시 30분, 서귀포시 토평동 한 아파트 단지. 전봇대에는 어미 매가 날개를 접은 채 주변을 살피고, 아파트 외벽 난간에는 목덜미가 희끗한 어린 새끼 매가 앉아 있었습니다. 제보자 오윤지 씨는 “비둘기보다 훨씬 큰 맹금류가 민가 한복판에 둥지를 튼 게 신기해 바로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며 “아직 둥지를 떠나지 못한 걸로 보아 ‘이소(離巢·새끼 새가 둥지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 중인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 매, 해안절벽에서 아파트로 매는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 Ⅰ급으로 보호받는 텃새로, 제주 해안절벽에서 번식하는 대표 맹금류입니다. 보통은 바위 틈 맨바닥에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제주에서는 도심 건물에서 번식하는 장면이 꾸준히 목격되고 있습니다. 올해만 해도 관광대학교·한라대 건물에서 매 번식이 확인됐고, 과거 제주시 노형동 건물 화단에서도 둥지를 틀어 새끼들이 자라난 사례가 기록됐습니다. 강창완 한국조류보호협회 제주도지회장은 “매가 도심 건물에서 번식하는 건 더 이상 낯선 일은 아니다”라면서, “둥지 자리가 부족하고 경쟁에서 밀린 개체들이 인간 생활권을 새로운 공간으로 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검독수리 발견과 맞물린 메시지 불과 하루 전, 환경부 국립생태원은 한라산 절벽에서 검독수리 둥지가 발견됐다고 발표했습니다. 1948년 예봉산 이후 77년 만의 기록이었습니다. 검독수리의 귀환과 매의 도심 번식은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됩니다. 맹금류의 번식지가 다시 제주에서 확인됐지만, 동시에 원래의 서식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공존의 시대, 인간의 책임은 매는 집비둘기, 참새, 직박구리 같은 도심 새들을 사냥하며 살아갑니다. 아비매가 사냥해온 먹이를 어미매가 찢어 새끼에게 먹이는 모습은 어찌보면 인간의 육아와도 제법 닮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팔색조와 같은 천연기념물 희귀종이 희생되기도 하고, 먹이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제주의 해안은 도로 개발과 관광지 확장으로 번식지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해안절벽을 잃은 매들이 점점 도심지를 찾아 날개를 접고, 고층 아파트 난간에 둥지를 만드는 건, 어쩌면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자 자연의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강 지회장은 “도심에 정착한 개체들은 다른 영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며, “보호구역 관리뿐 아니라 시민 인식 변화와 더불어, 안전 가이드 마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날갯짓이 남긴 물음 한라산 절벽에서 되살아난 검독수리 둥지, 서귀포 아파트 난간에 자리 잡은 매 가족. 77년 만에 돌아온 하늘의 제왕과, 인간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심을 택한 매의 날갯짓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자연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25-09-1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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