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더 이상 떠드는 산업이 아니다”... 조용해진 일정, 줄어든 이동, 그래서 완성된 하루
여행이 조용해졌습니다. 사람이 줄어서가 아닙니다. 경기가 식어서도 아닙니다. 여행이 스스로 소음을 걷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우리의 여행은 얼마나 멀리 갔는지, 얼마나 많은 장소를 소화했는지, 얼마나 빽빽한 일정표를 채웠는지로 평가받았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이동은 줄고, 일정은 접히고, 하루가 하나의 감각으로 끝나는 여행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유행이 아닙니다. 글로벌 여행시장은 이미 같은 방향으로 이동을 끝냈고, 이제 그 결과가 상품과 소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올겨울 제주가 놓여 있습니다. ■ 여행시장이 먼저 내려놓은 것, ‘많이 움직이는 일정’ 최근 전 세계 여행 소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여행 만족도를 가장 크게 떨어뜨리는 요소가 ‘비용’도, ‘거리’도 아닌 과도한 이동이라는 인식입니다. 렌터카, 잦은 환승, 날씨 변수, 시간 압박. 여행의 기억보다 이동의 피로가 먼저 남는 구조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행은 바뀌었습니다. 많이 넣는 일정 대신 실패 가능성을 지운 구조, 확장보다는 완결, 자유보다는 안정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은 이제 계획하는 대상이 아니라, 맡기는 경험으로 정의를 바꿔가고 있습니다. ■ 제주 겨울,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체화한 현장 올겨울 제주에서 출시된 호텔·리조트 상품들은 놀라울 만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하루를 끝낼 수 있을까.” SK핀크스가 운영하는 포도호텔의 겨울 패키지는 객실 안 프라이빗 온천과 시그니처 우동이라는 단촐한 구성으로 이 질문에 답합니다. 일정을 줄인 것이 아니라, 이동 자체를 설계에서 지웠습니다. 같은 그룹의 디아넥스는 아라고나이트 고온천, 실내 수영장, 동백꽃 명소 나들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습니다. 가족 여행에서 가장 큰 리스크인 일정 분산과 이동 부담을 제거한 선택입니다. 이는 비싼 코스를 압축한 고급화 전략이 아닙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정밀하게 계산한 판단 결과에 가깝습니다. ■ 미식, ‘부가 경험’이 아니라 ‘여행의 중심’이 되다 이 변화는 음식에서 가장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미식은 더 이상 옵션이 아니라, 일정의 중심축이 됐습니다. 제주신화월드는 연말 시즌에 맞춰 24일과 31일, 리조트 내부에서 모든 경험이 완결되는 미식 중심 구성을 제시했습니다. 중식 ‘용푸’의 와인 페어링 코스, ‘제주선 더블랙’의 철판 디너, ‘랜딩 다이닝’의 생참치 해체 쇼. 여기서 중요한 건 메뉴가 아닙니다. 연말이라는 시간을 한곳에서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든 구조입니다. 제주시권 글래드 호텔이 선보이는 ‘시그니처 올스타 프로모션’ 역시 같은 방향입니다. 한 해 동안 가장 반응이 좋았던 메뉴만 다시 모았습니다. 새로움보다 확실한 만족, 실험보다 실패하지 않는 하루를 택한 선택입니다. ■ 그리고 여행사는, 출발 이유부터 다시 짰다 이 변화가 호텔에만 머물렀다면, 숙박 시장 내부의 조정에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근 여행시장에서 눈에 띄는 상품은 여행의 출발점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교원투어 여행이지의 젊은층 대상 ‘대만 주류 투어’가 그렇습니다. 이 상품은 대만을 ‘다녀오는 곳’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류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으로 정의합니다. 카발란 위스키 양조장,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 칵테일 바와 주류 전문 매장. 관광지는 배경으로 밀리고, 하나의 취향이 여행 전체를 관통합니다. 노팁·노옵션·노쇼핑, 20~30대 전용, 출발일 한정. 상품은 확장이 니라 집중입니다. 여행사는 “어디를 갈까”가 아니라, “왜 떠나야 하지”를 묻습니다. ■ 제주와 대만, 전혀 다른데 같은 답 제주의 겨울 호텔과 대만의 2030 주류 투어는 전혀 다른 상품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머무는 여행이고, 하나는 떠나는 여행입니다. 하지만 지향점은 같습니다. 이동을 줄이거나, 이동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경험의 밀도를 높이는 방식입니다. 날씨와 피로, 일정 변수는 설계 단계에서 미리 걷어내고, 하루를 하나의 감각으로 완결합니다. 글로벌 여행시장이 말하는 ‘슬로 트래블’, ‘웰니스’, ‘취향 중심 여행’이 제주와 대만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구현되고 있을 뿐입니다. ■ 유행이 아니라, 기준의 이동 지금 벌어지는 변화는 트렌드가 아닙니다. 여행을 소비하는 판단 기준 자체가 이동했습니다. 어디를 갔는가에서 무엇이 남았는가로, 얼마나 봤는가에서 얼마나 편안했는가로, 싸게 갔는가에서 실패하지 않았는가로. 호텔은 머무는 방식을 바꾸고, 여행사는 떠나는 이유를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는 이미 그 선택을 끝냈습니다.
2025-12-1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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