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일 만에 찾은 400m… CCTV 118대 놓친 경찰
실종 신고 허위 종결 A 경장 석방.. 법원 "긴급체포 위법"
제주서 실종 신고된 또다른 남성 시신 발견
돌은 돌고, 벽이 숨 쉰다… 제주가 낯선 것을 ‘제주’로 만든 시간
제주비엔날레 내일 개막.. 유배·돌·신화의 변용
농민단체 "농작물 재해보험 전면 개혁 필요"
104일 만에 찾은 400m… CCTV 118대 놓친 경찰
제주에서 석 달 넘게 실종됐던 장미란 씨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된 곳은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숙소에서 불과 400여m 떨어진 야자수농장이었습니다. 장 씨가 숙소를 나간 지 104일 만입니다. 실종 신고가 처음 접수됐을 당시에는 한림읍 일대 CCTV 118대의 영상이 모두 남아 있었습니다. 경찰이 제주도에 공식 열람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98일이 지나 영상이 전부 삭제된 뒤였습니다. 현재 확인되는 장 씨의 마지막 모습 역시 경찰이 확보한 공공 CCTV가 아니라 가족 측이 확보한 영상입니다. 허위 종결로 처음 한 번 시간을 놓친 뒤 장 씨를 찾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시간과 거리를 놓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커지고 있습니다. ■ 104일 뒤 발견된 곳은 숙소에서 400여m 제주경찰청은 24일 오전 10시 46분쯤 제주시 한림읍 수원리의 한 야자수농장에서 장 씨로 추정되는 여성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시신은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경찰은 현장에서 장 씨가 실종 당시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옷과 팔찌, 휴대전화 등을 확인하고 DNA 감식과 부검을 통해 정확한 신원과 사망 원인을 밝힐 예정입니다. 현재까지 경찰은 범죄 피해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발견 장소입니다. 장 씨가 지난 5월 12일 밤 마지막으로 나온 숙소에서 직선거리 약 400m, 걸어서 5분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장 씨가 평소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던 곳으로도 조사됐습니다. 경찰은 그동안 장 씨 휴대전화의 마지막 위치값을 토대로 한림항 일대를 중심으로 수색했습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한림항에서 직선거리 약 1㎞ 떨어져 있지만 같은 기지국 반경에 포함됩니다. 경찰은 해당 지역도 앞서 수색했지만 투입 인원에 비해 구역이 넓어 세밀하게 살피지 못했고, 해안가에서 육상으로 범위를 넓히는 과정에서 시신을 발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가족이 지난달 19일 다시 실종 신고를 한 뒤에도 한 달 넘게 장 씨를 찾지 못했습니다. 헬기와 드론, 경비정 등을 투입한 집중수색은 실종 사건의 허위 종결 사실이 알려진 뒤인 지난 20일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결국 집중수색 닷새째, 장 씨가 사라진 지 104일 만에 숙소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서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 살아 있던 CCTV 118대… 98일 뒤에야 열람 요청 장 씨가 실종된 한림읍 일대에는 방범용 CCTV 111대와 교통정보수집용 카메라 7대 등 모두 118대가 있었습니다. 지난 5월 15일 최초 신고가 접수됐을 당시에는 실종 전후 영상이 모두 보존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CCTV 영상 보존기간은 30일이었습니다. 장 씨가 사라진 5월 12일부터 20일까지 촬영된 영상은 6월 11일부터 19일까지 차례로 자동 삭제됐습니다. 제주서부경찰서가 제주도에 관련 영상을 공식 요청한 것은 지난 19일입니다. 장 씨 실종 추정일로부터 98일, 최초 신고일로부터 96일이 지난 뒤입니다. 마지막 영상이 삭제된 시점에서도 61일이 흐른 뒤였습니다. 경찰이 장 씨의 이동 경로를 복원할 수 있었던 영상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숙소를 나온 뒤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시신이 발견된 장소까지 어떤 경로로 갔는지를 확인할 핵심 자료였습니다. ■ 마지막 모습도 가족 측이 확보 현재 공개된 장 씨의 마지막 모습은 지난 5월 12일 밤 숙소에서 홀로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 영상은 가족 측이 확보해 제공한 자료로 확인됩니다. 반면 경찰이 최초 신고 당시 주변 공공 CCTV 영상을 별도로 확보했다는 사실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장 씨의 남자친구는 지난 5월 15일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담당 A 경장은 신고를 받은 뒤 장 씨와 연락이 닿아 안전을 확인했다는 취지로 사건을 종결했습니다. 이후 통신기록을 확인한 결과 A 경장과 장 씨가 통화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고 직접 만나 안전 여부를 확인한 사실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실종 사건이 다시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두 달여 뒤였습니다. 그 사이 주변 CCTV 118대 영상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 허위 종결 수사마저 긴급체포 위법 판단 장 씨 실종 사건을 허위로 종결한 혐의를 받는 A 경장에 대한 수사도 절차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경찰은 지난 22일 A 경장을 직무유기와 공전자기록 위작·행사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했습니다. 하지만 제주지법은 24일 A 경장이 낸 체포적부심을 받아들여 석방을 결정했습니다. 법원은 A 경장의 신원과 소재가 계속 확인되고 있었던 만큼 사전에 체포영장을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형사소송법상 긴급체포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별도의 전담수사팀을 꾸리고 A 경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경찰도 A 경장이 담당했던 실종 사건 200여 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2026-08-2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조희대 "국가권력 자의적 행사 통제하는 '법의 지배' 가치 소중"
대법관 후보 서면 제청으로 청와대와 여당과 갈등을 빚고 있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조 대법원장은 오늘(24일) 대한변호사협회 주최 '제34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 축사에서 "사법제도가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통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법의 지배'라는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법원에 대해선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사법권을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따라 엄정하게 행사해 법치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책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사법부는 본연의 임무인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조 대법원장은 "대법원은 지난 2월 변호인과 의뢰인 사이의 비밀유지권이 헌법상 보장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핵심 내용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이를 침해해 수집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부정해 국민의 방어권을 보호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며 국민 권리 보호를 위한 사법부의 노력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서울중앙지법과 창원지법에서 시범 운영한 '민생사건 적시처리 재판부'를 통해 법적 보호가 필요한 시기를 놓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는 국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조 대법원장은 또 "사법부는 최근 사법제도의 변화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다양한 우려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언제나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변호사 단체를 비롯한 법조계와 긴밀히 소통해 사법제도가 오직 국민을 위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말했습니다. 조 대법원장과 함께 축사에 나선 김상환 헌법재판소장은 지난 3월 시행된 재판소원 제도의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김 소장은 "재판소원 제도는 법을 해석하고 실현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법조인에게 헌법의 최고 규범성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고 '헌법의 시선'으로 자신의 판단을 더욱 겸허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법제도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지만, 어떤 변화도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며 "제도의 효율성과 신속성도 중요하지만, 모든 국민이 공정한 절차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은 흔들려선 안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2026-08-24 제주방송 이효형 (getstarted@hanmail.net) 기자

李대통령, 정성호 법무장관 사의 수리.. "신속히 후속 인선 착수"
이재명 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한 정성호 법무부 장관의 사직서를 오늘(24일) 자로 수리했습니다. 강유정 대통령실 수석대변인은 이날 언론 공지를 통해 "이 대통령은 건강 악화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힌 정 장관의 사의를 수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정부는 국정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신속히 후속 인선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정 장관은 지난 18일 건강상의 이유와 함께 검찰개혁 관련 주요 입법이 마무리됐다는 취지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재명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인 정 장관은 지난 1년간 검찰청 폐지와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신설 등 검찰개혁을 주도했습니다. 다만 검사의 보완수사권을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두고는 반대 입장을 밝히며 여당과 일부 이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정 장관은 사직서를 제출한 직후 SNS를 통해 "정권이 민심을 떠나 존립할 수 없듯, 주권자인 국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개혁 또한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며 "국회와 정부는 형사사법제도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국민의 삶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습니다.
2026-08-24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실종 셀프 종결'에 조국혁신당 "국민 생명 못 키지는 경찰 존재 이유 없어"
지난 5월 제주에서 실종된 장미란 씨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된 가운데, 경찰의 실종 신고 허위 종결을 두고 정치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박상현 조국혁신당 대변인은 오늘(24일) 논평을 통해 "이번 사건은 단순한 수사 지연이나 실책이 아니"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경찰이 실종 신고를 접수한 지 불과 2시간 30분 만에 '당사자와 연락이 닿았고 무사하다'는 거짓말로 사건을 셀프 종결하고 내부 시스템 기록까지 삭제한 명백한 범죄"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경찰이 사건을 덮어버린 104일이라는 시간 동안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은 골든타임을 놓친 채 방치됐다"라며 "공직 기강 해이가 목불인견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박 대변인은 "이는 개별 경찰관 한 사람의 일탈을 넘어 경찰 내부의 사건처리 시스템이 얼마나 무력화됐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라며 "국민 생명과 직결된 실종 사건을 담당관 개인의 판단으로 손쉽게 종결할 수 있는 현재의 허술한 절차는 공권력에 대한 국민 신뢰를 뿌리째 흔드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경찰을 향해선 "해당 사건의 허위 종결 경위, 조직적 묵인·방조 여부를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히 수사하고 지휘부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압박했습니다. 이어 "또 실종 사건의 접수·처리·종결 과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담당자 임의 처리를 막는 실질적인 2중·3중 검증 시스템을 즉각 구축해야 한다"라며 "아울러 수사권의 엄중함에 걸맞은 철저한 공직 기강 확립과 외부 감시 및 견제 장치를 강화해 무너진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전면적인 수사 시스템 개편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경찰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라며 "안전한 사회와 신뢰받는 수사기관을 만들기 위해 관련 제도 개선과 법적 장치 마련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2026-08-24 제주방송 이효형 (getstarted@hanmail.net) 기자

돌은 돌고, 벽이 숨 쉰다… 제주가 낯선 것을 ‘제주’로 만든 시간
제주에서 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24개의 물레 위에 올라간 현무암이 돌아가고, 서로 스치는 돌의 소리는 전시장 안에서 하나의 리듬을 만듭니다. 원도심에서는 높이 6m, 폭 15m가 넘는 벽이 거대한 화면으로 바뀝니다. 오래된 극장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라진 마을과 사람들의 기억이 들어옵니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시간이 수백 년을 건너뜁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인공지능(AI)으로 만들어진 여섯 증인의 얼굴이 같은 전시 안에 놓입니다. 한쪽에는 유배가 있고 다른 쪽에는 난민과 이주가 있습니다. 현무암 옆으로 운석과 가상현실(VR)이 등장하고, 굿과 신화는 영상과 설치를 입습니다. 서로 멀어 보이는 장면을 한데 끌어모은 질문은 의외로 제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것은 이 섬에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이 25일 막을 올립니다. 20개국 69팀(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해 오는 11월 15일까지 83일 동안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 레미콘 등 5개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입니다. 올해 비엔날레가 꺼낸 세 갈래는 유배와 돌문화, 신화입니다. 제주를 완성된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하는 대신 사람과 문화, 믿음과 기억이 들어오고 섞인 뒤 달라져 온 과정으로 들여다봅니다. 무엇이 제주다운가보다 ‘제주다운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전시에 풀어냈습니다. ■ ‘제주다움’을 원형에서 찾지 않는다 ‘허끄곡 모닥치곡’은 제주어로 ‘섞이고 모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야홍’은 제주민요 〈이야홍 타령〉의 후렴구입니다. 여기에 붙은 말이 ‘변용의 기술’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가 제주에 닿은 뒤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낯선 것과 토착의 것이 부딪히고 뒤섞이면서 이전에 없던 모습이 생겨난 시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섞임’은 원형의 훼손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카리브해의 역사와 언어를 사유했던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크레올화(créolisation)’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어느 한쪽에 흡수되지 않은 채, 만남 이전에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관계와 형식을 만들어낸다는 개념입니다. 이번 비엔날레가 글리상의 이론을 직접적인 전시 방법론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주를 고정된 원형이 아니라, 외부와의 접촉 속에서 계속 형태를 바꿔온 장소로 본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함께 읽힙니다. 유배로 들어온 사람, 대륙에서 건너온 믿음, 바다를 타고 유입된 문화는 제주에 도착한 뒤 이곳의 환경과 생활 속에서 다른 형태를 얻었습니다. 제주를 제주답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묻는 대신, ‘무엇이 제주에 와서 어떻게 제주가 됐는지’를 묻습니다. ■ 추사의 유배에서 오늘의 난민까지 첫 번째 갈래는 유배입니다. 제주도립미술관의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는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에서 출발합니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섬에 갇혔던 시간이 한 예술가의 조형 언어를 어떻게 바꿨는지 따라갑니다. 1층은 추사가 인장으로 사용한 ‘불계공졸(不計工拙)’을 비롯해 ‘귤화위지(橘化爲枳)’, ‘병거사예(病居士藝)’ 세 갈래로 구성됩니다. 김정희의 〈세한도〉 영인본과 제주 문자도, 현중화의 〈취시선〉이 전시의 문을 열고 오석훈의 대형 수묵 〈한라영곡〉, 조기섭의 〈걷는 풍경: 7계〉, 이현태의 오디오비주얼 설치 〈어 김없 는 것과 어긋나는(거)〉가 이어집니다. 2층 ‘세한(歲寒): 동시대 유배’에 올라서면 유배의 뜻이 달라집니다. 조선시대의 형벌에서 난민과 흩어진 이주민 등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 했던 오늘의 사람들에게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아슬란 고이숨과 알라아 에드리스, 윤진미, 류봉식, 정기엽의 작업이 여기에 놓입니다. 아랍에미리트 작가 알라아 에드리스는 폐허가 된 고대 유적과 신화·우화·전설을 오늘의 삶으로 불러옵니다. 〈휴전 오만 시대의 일곱 정령들〉과 〈서커스(Circus)〉 연작을 통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달라지는 기억을 보여줍니다. 제주 작가 이쥬는 AI를 전시장으로 들였습니다. 신작 〈아포리아의 증인〉에서 관람객은 AI로 만들어진 여섯 증인의 얼굴 앞에 섭니다. 설문에 답해 나가면 마지막에 한 명의 증인과 연결됩니다. 타인의 사건을 바라보던 관람객 자신이 가해와 피해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구조입니다. 수백 년 전 제주로 밀려난 추사에서 국경과 고향을 떠나는 오늘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람객까지 이어집니다. ■ 현무암이 돌기 시작했다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로 가면 돌의 쓰임부터 달라집니다. ‘검으나 돌은 구르고 굴러: 돌문화’입니다. 현무암을 돌담과 오름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상징에 묶어두지 않고 소리와 움직임, 생명과 우주의 영역까지 밀어냅니다 김현성의 신작 〈담지체〉에는 24개의 물레와 돌이 등장합니다. 관람객이 물레를 움직이면 돌이 돌면서 마찰음을 냅니다. 각각의 소리가 겹쳐지면서 공간 안에 새로운 리듬이 생깁니다. 작가는 이를 ‘24개 행성들의 새로운 질서’라고 부릅니다. 일본 작가 오카베 마사오와 사진작가 미나토 치히로는 신작 〈TIME RINGS〉로 제주와 홋카이도, 히로시마의 기억을 연결합니다. 전시장의 습기가 스스로 흔적을 만드는 갈라 포라스-김의 〈Forecasting Signal〉, 운석을 주인공으로 삼은 룸톤의 VR 작업 〈에코스피어〉,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김정헌은 〈흙 한줌의 인과성, 우주 생명의 토양〉에서 작은 흙 한 줌을 우주 생명의 토양으로 바라봅니다. 야외 중정에는 송필의 〈실크로드, 전설(version 2)〉과 강문석의 〈초원〉이 설치됩니다. 제주의 검은 돌에서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어느새 행성과 운석, 생명의 시간까지 나아갑니다. ■ 제주 신화 옆에 우크라이나의 기억이 놓이다 신화는 미술관을 빠져나와 원도심으로 향합니다. ‘큰 할망의 배꼽: 신화’가 제주아트플랫폼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 레미콘에서 펼쳐집니다. 제주아트플랫폼 3층 대공연장에서는 캐나다 작가 뱅상 모리세와 캐롤라인 로버트의 〈테라(TERRA)〉가 높이 6m, 폭 15m가 넘는 벽 전체를 화면으로 바꿉니다. 5층 옛 영화관에는 우크라이나 작가 자나 카디로바의 신작 〈Performance VI〉가 들어왔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라진 마을과 잃어버린 사람들의 기억을 작업해 온 작가는 기존 퍼포먼스 연작을 제주라는 장소에 맞춰 새롭게 번안했습니다. 전쟁을 통과한 기억이 수천㎞를 건너 제주 원도심의 옛 극장에 자리 잡았습니다. 예술공간 이아에서는 제주의 녹나무를 신목이자 우주목으로 상상하는 〈날과 씨〉, 북방의 휘파람과 제주 해녀 숨비소리의 공통 기원에 주목한 김상돈의 〈거울 속 열쇠들-4개의 싹〉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최민화는 고대 신화를 다시 그리고 곽윤주는 심방과 굿을 영상으로 기록합니다. 국가민속문화유산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확대 복제와 ‘천지왕본풀이’에서 출발한 손유진의 〈The Between Two Suns and Two Moons〉도 전시됩니다. 신화 역시 박제하지 않습니다. 다시 그리고, 촬영하고, 다른 장소에서 건너온 기억과 섞어 현재의 언어로 옮깁니다. ■ 남방의 ‘표류’ 지나 북방으로 제4회 제주비엔날레가 ‘표류’를 통해 제주와 남방문화의 연결을 탐색했다면 이번에는 시선을 북방으로 넓혔습니다. 유배와 이주, 신화를 따라 북방문화와 제주가 이어져 온 흐름을 살핍니다. 중요한 건 문화가 어느 방향에서 들어왔느냐만은 아닙니다. 도착한 뒤 벌어진 변화입니다. 밖에서 건너온 사람과 문화가 제주에서 무엇으로 달라졌는지, 서로 다른 것이 만난 자리에 어떤 모습이 생겨났는지가 전시의 중심에 놓입니다. 그만큼 전시가 이어 붙여야 할 거리도 상당합니다. 추사와 난민, 현무암과 운석, 제주 신화와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한 비엔날레 안에 들어옵니다. 전시장도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돌문화공원과 원도심까지 흩어져 있습니다. 이 간격을 ‘변용’이라는 하나의 언어가 얼마나 촘촘하게 이어낼지는 83일 동안 작품과 관객이 만나면서 드러납니다. 이종후 예술감독은 “지난 비엔날레가 표류로 남방문화와의 연결을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유배와 신화, 돌문화를 통해 북방문화와 제주가 이어져 온 흐름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며 “서로 다른 문화가 제주에서 뒤섞이고 합쳐지며 만들어낸 변용의 기술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이야기하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개막식은 24일 오후 6시 관덕정 광장에서 열립니다. 홍보대사 김창옥의 인사말과 경기소리꾼 이희문의 축하공연도 예정됐습니다. 25일 추사의 글씨와 AI가 만든 얼굴, 물레 위를 도는 돌, 전쟁을 건너온 기억과 오래된 제주 신화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관람객을 기다립니다. 제주가 외부 세계와 만나며 끊임없이 달라져 왔다면, 지금 우리가 ‘제주답다’고 부르는 풍경 역시 오랜 변용 끝에 남은 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돌은 돌고, 신화는 자리를 옮기며, 낯선 것은 제주에 닿아 또 다른 모습이 됩니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는 그렇게 만들어진 제주를 83일 동안 다시 더듬어갑니다. 전시는 25일부터 11월 15일까지 이어집니다.
2026-08-2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