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째 바다 건너간 제주… 소록도의 여름을 고치고, 안부를 남겼다
소록도의 낮 기온이 35도까지 오른 지난 23일, 제주에서 건너온 이들은 집 안부터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찢어진 방충망을 떼어내고 오래된 장판을 걷었습니다. 에어컨 필터와 선풍기를 손봤고, 마을에서는 예초기와 기계톱이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병원과 주민들의 집 안팎에서는 미용과 목욕, 청소가 이어졌습니다. 천주교 제주교구 성다미안회가 지난 23일부터 26일까지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진행한 제37차 나눔활동입니다. 초·중·고교생부터 90세를 바라보는 어르신까지 제주도민 13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이 소록도를 처음 찾은 것은 1984년입니다. 코로나19로 방문이 멈춘 시기를 제외하면 제주와 소록도 사이에는 42년째 같은 약속이 오가고 있습니다. ■ 머리를 다듬고, 지난 1년을 물었다 봉사자들의 하루는 오전 8시에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중앙리와 신생리, 동생리 등 소록도 4개 마을에서 미용과 간병, 목욕, 집안 청소, 시설 수리, 예초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전문 미용사 등 10명으로 꾸려진 미용팀은 소록도병원 환자 40명을 포함해 주민 100여 명의 머리를 손질했습니다. 염색과 파마, 커트가 이어지는 동안 주민들은 지난여름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미용팀은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건강과 가족, 마을의 안부까지 함께 살폈습니다. 소록도 나눔활동 초기부터 참여한 여혜숙 미용팀장은 “짧은 일정이라 늘 아쉽지만, 보람과 아름다운 인연에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다미안회의 미용 봉사는 해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지난해보다 머리가 희끗해진 주민을 알아보고, 몸이 불편해진 사정을 들으며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시 잇는 시간입니다. ■ 방충망 256개, 장판 35가구… 생활의 불편을 걷어내다 생활지원팀은 사전에 신청받은 64가구를 방문해 창틀 방충망 256개를 교체했습니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수리하거나 청소한 가구도 40여 곳에 달했습니다. 2번지성당 숙소의 타일과 지붕도 손봤습니다. 장판팀은 35가구의 방과 마루에 새 장판을 깔았고, 도배팀은 9가구의 낡은 벽지를 걷어냈습니다. 소록도 주민 상당수는 고령인 데다 한센병 후유증으로 손발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에어컨 실외기나 냉장고, 선풍기 필터를 청소하는 일도 혼자 감당하기 쉽지 않습니다. 동생리 최성운 이장은 “주민들이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을 봉사자들이 해마다 친절하게 해결해 준다”며 “덕분에 주민들이 한결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주방지원팀은 주민들이 사용하는 칼과 낫 200여 개를 벼렸습니다. 마을팀은 팥빙수 200여 그릇을 만들어 집집마다 배달했고,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의 목욕과 청소를 도왔습니다. 예초팀은 마을 곳곳에 무성하게 자란 풀과 잡목을 정리했습니다. 성당·수녀원팀은 성당 2곳과 수녀원 안팎을 청소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했습니다. 봉사자들이 사용한 예초기와 기계톱, 주방 식기, 장판과 도배지 등 장비와 자재는 모두 제주에서 가져왔습니다. 현지 주민에게 준비와 비용의 부담을 남기지 않겠다는 원칙입니다. ■ 새벽 4시부터 차린 한 끼, 현장을 버티게 하다 소록도의 마을과 병원에서 여러 팀이 움직이는 동안 숙소 주방에서는 더 이른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주방팀은 새벽 4시부터 130여 명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폭염 속에서 작업을 마친 봉사자들이 다시 현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끼니마다 힘을 보탰습니다. 밖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나흘간의 봉사를 떠받친 가장 든든한 역할 중 하나였습니다. 올해 처음 소록도를 찾은 김현태 학생(조천중 2)은 성당팀에 배치돼 마을 주변의 잡목을 자르고 운반했습니다. 김 군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신청해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지만, 형과 삼촌들과 함께 일하면서 봉사의 의미를 몸으로 배웠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소록도에서는 청소년과 청년, 중장년과 노년층이 같은 작업복을 입습니다. 나이와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의 불편을 덜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 소록도로 건너가고, 제주로 다시 초대하다 성다미안회와 소록도의 관계는 여름철 방문봉사 하나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성다미안회는 1998년부터 소록도 주민들을 제주로 초청해 문화탐방도 진행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555명이 제주를 찾았습니다. 앞서 지난헤 3월에도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 24명이 제주를 찾아 산방산과 더마파크, 에코랜드 등을 둘러봤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소록도로 가서 집을 고치고 머리를 손질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소록도 주민들이 제주를 방문해 함께 여행하고 식사하며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겨울이면 제주 감귤도 소록도로 보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가르기보다 서로의 삶터를 오가며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온 관계입니다. 소록도 주민자치회는 2021년 옛 소록도 공회당에 성다미안회의 활동을 기리는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소록도 나눔활동에 참여한 인원은 연인원 4,800여 명에 달합니다. ■ 제주 행정을 이끈 고흥군수, 소록도에서 다시 엮인 인연 지난 25일에는 공영민 고흥군수도 봉사 현장을 찾았습니다. 공 군수는 제주도 기획실장과 제주연구원장을 지낸 뒤 고향인 고흥으로 돌아가 군정을 이끌고 있습니다. 고향은 고흥이지만 공직 생활의 주요 시간을 제주에서 보낸 만큼, 소록도에서 제주도민 봉사자들을 맞는 감회도 남달랐습니다. 제주 행정의 중심에서 일했던 고흥군수와 제주에서 건너온 봉사자들이 소록도에서 다시 만난 셈입니다. 공 군수는 “제주도민들이 해마다 소록도를 향해 보내는 사랑과 나눔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며 “명예도민으로서 자부심도 크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소록도가 외로운 섬이 아니라 따뜻한 공동체가 상생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줘 늘 감사하다”고 밝혔습니다. 제주와 고흥을 잇는 것은 항로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서로를 찾아온 사람들이 두 지역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있습니다. ■ 격리의 섬에 쌓인 42년의 방문 소록도는 1916년 일제가 소록도자혜의원을 세운 뒤 이듬해부터 한센인을 강제로 수용하면서 격리와 차별의 공간이 됐습니다. 한센병은 약물 치료를 통해 감염력을 없애고 완치할 수 있는 질환입니다. 그러나 과거 유전병이나 불치병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환자와 가족들은 질병보다 오래 남는 편견을 견뎌야 했습니다. 1962년 소록도에 들어온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은 40년 넘게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일상을 돌봤습니다. 성다미안회라는 이름도 평생 한센인을 돌본 성 다미안 신부의 삶에서 가져왔습니다. 1984년 회원 24명이 소록도에서 한센병 교육과 피정에 참여한 뒤 나눔활동이 시작됐습니다. 2019년 제34차 활동 이후 코로나19로 3년간 방문이 중단됐지만, 2024년 다시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강승표 성다미안회 회장은 “개인주의가 만연해진다고 걱정하지만 소록도 나눔활동에는 해마다 많은 도민이 참여하고 있다”며 “한센인을 향한 사회적 치유의 분위기도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더 보완해 체감할 수 있는 도움을 높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나흘 동안 제주도민들은 낡은 벽지를 걷어내고 장판을 갈았습니다. 찢어진 방충망을 바꾸고 무성한 풀을 베며 주민들의 여름을 손봤습니다. 42년 동안 이들이 고쳐온 것은 집 안의 불편만이 아니었습니다. 올해 나눔을 마치고 소록도를 떠나면서도 작별인사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다음 여름을 기약했습니다. 42년째 이어진 그 안부에는 아직 마침표가 없습니다.
2026-07-2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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