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덜 지었더니, 도시가 들어왔다”… 제주 한복판에 펼친 ‘낮은 건축’을 만났다
제주시 오라동. 병원이며 상가, 공동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선 도심입니다. 그 사이, 유난히 낮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높이를 다투지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땅을 채우지도 않았습니다. 낮은 박공지붕 아래 건물을 여러 동으로 나눠 앉혔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나무를 심고 제주 돌담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비워둔 그 사이를 다시 길로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건물을 보게 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선은 건물이 없는 곳으로 향합니다. 정원입니다. 건축가가 채운 것보다 남겨놓은 것이 이 건축을 설명합니다. 14일 공개된 ‘도시 오아시스’입니다. 설계와 감리는 에이루트건축사사무소의 이창규·강정윤 공동대표가 맡았습니다. 두 사람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2025 젊은 건축가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당시 심사에서는 주변 맥락을 탐구하는 태도와 제주의 장소적 특성을 건축에 녹여내는 작업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시공은 이아컴퍼니와 하백종합건설이 참여했고, 김봉찬 대표의 더가든이 조경을 맡았습니다. 설계와 시공, 조경이 각각 건물과 구조, 정원을 따로 완성하기보다 처음부터 서로 맞물리는 방식으로 공간을 풀어냈습니다. 14일부터 이틀 동안 오픈하우스를 열어 공간을 공개했습니다. ■ 한 채를 짓는 대신, ‘사이’를 만들었다 도심의 땅은 대개 얼마나 많이 지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고는 합니다. 얼마나 넓게 쓸 수 있는지, 임대 면적은 얼마나 나오는지, 들인 비용을 어떻게 회수할지를 따져 묻는 게 흔합니다. 이곳에서는 질문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하나로 지을 수 있는 건물을 여러 동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바깥을 들였습니다. 건물이 차지할 수 있었던 자리를 나무와 풀, 돌담과 사람이 걷는 길에 내줬습니다. 그 결과 건축의 중심에 건물만 남지 않습니다. 한 건물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밖을 마주해야 합니다. 창을 바라보면 맞은편 벽보다 나무와 녹색이 먼저 시야에 들어옵니다. 건물 사이로 난 길을 걷다가 돌담을 만나고, 방향을 틀면 또 다른 정원이 열립니다. 공간을 가장 짧게 연결하는 대신 그 사이에 시간을 넣었습니다. 이창규 에이루트 공동대표는 “처음부터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 목표를 두지는 않았다”며 “임대를 통해 공간이 지속돼야 하지만 모든 땅을 건물로 채울 필요는 없다고 봤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무엇을 짓느냐만큼 무엇을 남겨놓느냐가 중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건물을 덜 지은 자리에 무엇을 놓을까. 그 질문이 이곳의 배치를 결정했습니다. ■ 지붕은 있는데 벽이 없다… 회랑이 만든 ‘중간의 공간’ 그 사이를 묶는 장치는 회랑입니다. 여러 공간을 이어주는 지붕 있는 긴 통로입니다. 이곳의 회랑을 복도라고 부르기에는 빠지는 것이 많습니다. 머리 위에는 지붕이 있지만 옆은 정원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고 그 틈으로 나무와 돌담, 건물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방에서 회랑으로, 회랑에서 정원으로, 다시 다른 건물로 옮겨가는 사이 안과 밖의 경계도 여러 차례 느슨해집니다. 실내에도, 정원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중간의 공간’입니다. 이 대표는 “보통 동선은 목적지까지 얼마나 편하고 빠르게 갈 것인가를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천천히 갔으면 했다”면서 “몇 걸음 더 걷더라도 나무와 돌담을 지나고 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도록 했다”고 말했습니다. 회랑은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지만 이곳에서는 사람과 정원을 연결합니다. 가장 빠른 길 대신, 그 길에서 보낼 시간을 설계했습니다. ■ 정원이란, 건물을 짓고 남은 땅이 아니다 그래서 조경도 건축이 끝난 뒤 시작되지 않습니다. 건물의 배치부터 정원이 들어갈 자리를 품고 있습니다. 낮은 건물 사이로 크고 작은 정원이 들어오고 회랑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갑니다. 실내의 큰 창도 정원을 향합니다. 나무 아래에는 작은 데크와 테이블, 의자를 놓았습니다. 밖에서 바라보는 녹지가 아닙니다. 건물 안에서 보고, 회랑에서 스치고, 직접 들어가 앉는 정원입니다. 조경을 맡은 김봉찬 더가든 대표는 서귀포시 신효동 ‘베케’에서도 에이루트와 건축과 정원의 관계를 함께 풀어냈습니다. 정원은 처음부터 완성된 풍경을 만드는 방식과 거리를 뒀습니다. 어린 나무와 식물이 자라고 계절마다 모습이 달라지면서 건축과 정원도 함께 변하도록 여지를 남겼습니다. 지금은 건물이 나무보다 큽니다. 그렇지만 나무가 자라 가지를 뻗으면 그늘의 폭이 달라지고 창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바뀝니다. 콘크리트 벽에 떨어지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도 해마다 다른 모양을 갖게 됩니다. 건물에는 준공일이 있지만, 정원에는 준공일이 없습니다. 건축이 끝난 뒤, 시간이 다시 이 공간을 짓기 시작합니다. ■ 정원 속에 건축을 놓았던 이들, 이번에는 도심을 비웠다 세 사람이 건축과 정원의 관계를 함께 풀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서귀포시 신효동 ‘베케’에서도 에이루트가 건축을, 김봉찬 대표의 더가든이 조경을 맡았습니다. 에이루트는 당시 작업에서 건축과 자연이라는 두 개체가 만나 서로의 경계를 흐리는 공존에 주목했습니다. 건축을 ‘반응하는 건축’이라고 표현하며 어느 한쪽이 공간을 압도하지 않고 적정선에서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라동에서는 조건이 달라졌습니다. 정원의 존재감이 강한 곳이 아니라 주변으로 높은 건물이 들어선 도심입니다. 이번에는 건물을 나눠 그 사이에 정원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정원 속에 건축을 놓았던 이들이 이번에는 도심 건축 안에 정원이 머물 자리를 내준 셈입니다. ■ 회색 콘크리트 위에 드러낸 나무 지붕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재료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회색 콘크리트 보 위로 목구조 박공지붕이 펼쳐집니다. 천장 안에 숨길 수도 있었던 나무 구조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돌담의 거친 표면과 회색 벽, 콘크리트, 따뜻한 색의 목구조가 한 공간에서 만납니다. 그렇다고 제주의 옛집을 그대로 옮겨놓지는 않았습니다. 박공지붕과 돌담, 낮은 건물, 마당을 사이에 둔 여러 채의 관계 등 제주에서 오래 보아온 공간의 감각을 가져오되 지금의 재료와 구조로 다시 풀었습니다. 이 대표는 “제주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더 관심을 뒀다”며 “집과 마당이 어떤 관계였는지,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안과 밖을 어떻게 오갔는지를 지금의 생활에 맞는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건축에서 ‘제주다움’을 찾는다면 특정한 형태 하나를 지목하기 어렵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무엇을 두었는지, 사람을 어떻게 걷게 하는지, 안과 밖을 얼마나 가까이 놓았는지를 보는 편이 낫습니다. ■ 돌담 뒤 고층건물… ‘옛 제주’가 아니라 지금의 도시 이 건축을 읽을 때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제주시 오라동이라는 장소입니다. 제주 돌담과 나무, 낮은 박공지붕 너머로 높은 건물이 솟아 있습니다. 주변이 낮은 마을이라 건물을 낮게 지은 게 아닙니다. 이미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된 곳에 낮은 건축을 놓았습니다. 제주의 옛 풍경을 따로 떼어 재현하기보다 커진 도시 안에서 사람이 만나는 공간의 크기를 다시 조정했습니다. 건물의 높이를 낮추자 나무가 보이고, 건물을 나누자 그 사이로 하늘이 들어왔습니다. 한 덩어리를 여러 채로 풀자 걷는 길이 생겼고, 그 길 옆에는 사람이 머물 자리가 생겼습니다. 강정윤 에이루트 공동대표는 “주변보다 눈에 띄는 건물을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다”며 “도시가 높아지고 밀도가 커질수록 이 땅에서는 사람의 눈높이에 가까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건물이 강하게 드러나기보다 그 사이에서 하늘과 나무가 보이는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높아지는 도시 한가운데서 이 건축은 높이를 더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의 자리를 사람과 나무, 빛과 하늘에 내줬습니다. ■ 오래된 도심을 들여다보던 건축가들 이창규·강정윤 대표는 제주에서 새 건물을 설계하는 것과 함께 이미 존재하는 도시와 장소를 들여다보는 작업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오래된 건축과 골목, 제주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공간의 쓰임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지금도 유효한 가치를 찾는 작업입니다. 에이루트 역시 오래된 시간과 장소에 깃든 가치를 살펴 이를 오늘의 건축 언어로 다시 짓는 것을 작업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강 대표는 “원도심에는 좋은 건물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집과 새 건물, 그 사이의 골목과 마당,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함께 있다”며 “옛 건물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런 공간이 왜 오랫동안 작동했는지를 보려고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래된 시간과 장소에서 지금도 유효한 가치를 찾아 새로운 건축 언어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오라동은 오래된 원도심과 조건이 다릅니다. 이미 시간이 쌓인 도시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와 이제 만들어지는 도시에서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는 다른 질문입니다. 두 건축가는 이번에 후자를 마주했습니다. ■ 결국 임대하는 건물… 그런데 ‘사이’는 닫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공익을 위해 만든 문화공간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공원도 공공시설도 아닙니다. 민간 소유의 근린생활시설입니다. 가운데 한 동은 민간 브랜드가 임대해 VIP 라운지 성격의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고, 나머지 공간도 전시 등을 포함해 활용할 계획입니다. 수익을 내는 공간이 들어옵니다. 이 사실을 빼고 건축주의 뜻과 정원만 이야기한다면 이 건축을 절반만 보는 셈입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상업성을 없앤 것이 아니라 수익을 내는 건물과 수익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공간을 한 필지 안에 함께 놓았다는 점입니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길을 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건물 사이를 지나 회랑을 걷고, 정원을 둘러본 뒤 다른 길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이 길과 정원은 오픈하우스가 끝난 뒤에도 일반에 계속 공개할 예정입니다. 정원을 바깥에서 바라보도록 경계를 둔 것과는 다릅니다. 사유지 안으로 사람의 길을 들였습니다. 이 대표는 “민간 건축인 만큼 경제적으로 지속될 수 있어야 하지만 이 땅에 들어온 사람이 반드시 어느 건물의 이용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냥 지나가도 되고 정원을 보고 가도 되는 길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습니다. 민간 건축의 공공성을 거창한 선언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냈습니다. ■ 부모에게 받은 땅… 가치를 모두 ‘평’으로 바꾸지 않았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면 이곳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개인의 재산입니다. 건축주는 땅을 팔거나 임대면적을 극대화하는 대신 일정한 수익을 얻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할 공간도 함께 남기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 생각을 건축으로 옮기는 과정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건축비가 들고 공간을 유지할 수입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건물은 임대합니다. 그러면서 옆에는 사람이 걷는 길을 남겼고 건물 사이에는 나무를 심었습니다. 경제성과 공간의 가치를 둘 중 하나로 고르지 않고 한 필지 안에 함께 놓은 선택입니다. 이 대표는 “건축주가 수익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공간이 오래 가려면 경제적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점도 명확했다”며 “중요했던 것은 수익을 얼마나 많이 낼 것인가만으로 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선택의 성패를 당장 판단하기는 이릅니다. 공개된 길과 정원이 시간이 지나도 처음의 취지대로 운영되는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땅의 가치를 모두 바닥면적으로 환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도시의 건축은 흔히 채운 면적을 계산합니다. 이곳에서는 비워놓은 자리도 가치의 계산에 넣었습니다. ■ 한 바퀴를 돌았는데, 멀리 가지 않았다 회랑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출발한 곳에서 그리 멀리 가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몇 걸음이면 지나칠 나무를 한 번 더 보게 되고, 현무암의 거친 표면을 지나, 기둥 사이로 들어오는 하늘을 몇 차례 더 마주합니다. 도시는 오랫동안 공간을 숫자로 계산해 왔습니다. 몇 평인지, 얼마인지, 얼마나 빨리 갈 수 있는지. ‘도시 오아시스’에는 그 계산에 잘 들어맞지 않는 단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입니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장 넓게 느껴지는 곳은 건물 안보다 그 사이였습니다. 사이를 걷는 동안 사람의 속도도 조금 느려집니다. 몇 걸음이면 지나칠 나무를 한 번 더 보고, 돌담을 지나고, 기둥 사이로 들어오는 하늘을 다시 마주합니다. 사람이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몇 분. 그리고 건축가는 끝내 건물로 만들지 않은 자리를, 사람의 길로 남겼습니다.
2026-08-14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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