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 장의 드로잉은 어떻게 ‘예쁜 제주’를 무너뜨렸나
[자막뉴스] "목소리로 학생 기억하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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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장의 드로잉은 어떻게 ‘예쁜 제주’를 무너뜨렸나
벽에는 그림보다 먼저 생활의 흔적이 보입니다. 종이 귀퉁이에 번진 커피 자국, 급하게 덧칠하다 멈춘 색연필 선, 아이 손바닥만 한 드로잉 아래 눌어붙은 테이프 자국 같은 것들입니다. 어떤 그림은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선이 자꾸 흔들린 데생도 있습니다. 다 그려놓고도 이름을 적지 않은 채 돌아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완성들이 공간의 공기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입을 여는 전시입니다. 저지리 올레길 14코스 인근 ‘미술카페쌤’에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한 5,000여 장의 그림들입니다. 여행객과 주민, 아이들과 수녀님들까지 자연스럽게 드나들던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은 잠깐씩 자기 시간을 종이 위에 내려놓고 갔습니다. 어떤 이는 바람이 지나간 방향을 그렸고, 또 다른 이는 동네 강아지를 남겼습니다.  평생 그림과 상관없이 살아오다 69년 만에 처음 아내 얼굴을 그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닿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서로 다른 계절에 제주를 지나간 시간들이 한 벽면 위에서 천천히 붙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그린 귤 옆에 낯모를 여행객의 바다가 걸리고, 오래 제주에 살았던 사람이 남긴 골목 풍경 옆에는 서툰 초상이 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벽은 어느 순간 그림을 거는 면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체온을 잠깐씩 말리러 온 자리로 변합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처음부터 작품의 우열을 세우지 않습니다. 잘 그린 그림보다 자꾸 시선이 붙드는 풍경이 있고, 설명하기 어려운데도 눈에 남는 투박한 선들이 있습니다. 한 번 들어온 시선은 선뜻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 ‘완성된 제주’는 없다 관광 포스터처럼 정리된 풍경도 없습니다. 비 오기 직전 갑자기 눅눅해지는 공기, 오후 네 시 무렵 골목 아래로 먼저 기울어지는 빛, 올레길 돌담 옆에 잠깐 멈춰 섰던 그림자만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나무로 그렸고, 어떤 사람은 색 하나만 남겼습니다. 인상적인 건 그림들의 높낮이가 자꾸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전문 작가의 작업 옆에 아이의 낙서가 붙고, 오래 훈련된 조형 언어 아래 이름 없는 여행자의 메모 같은 그림이 이어집니다. 고성자, 고우석, 권성운, 김강훈, 김성엽, 네모(이동조), 민채현, 윤병운, 이경미, 정주연, 최형준, 황호석 등 30여 명의 작가들도 이번 전시 안에서는 쉽게 앞줄로 걸어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깨의 힘을 풀어놓습니다. 순간 전시는 ‘누가 더 잘 만들었는가’보다 ‘누가 여기 잠깐 자기 시간을 두고 갔는가’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공동의 풍경》은 그림 자체보다, 그 앞에 남겨진 흔적들을 더 오래 바라보게 만듭니다. 벽면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을 ‘본다’는 감각 자체가 흐려집니다. 잠시 머물렀다 지나간 자리들을 천천히 지나고 있다는 느낌만 남습니다. ■ 참여를 말하지만, 대부분 오래 남지 못해 최근 동시대 예술은 연결과 참여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참여라는 말이 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전시에서 참여는 정해진 방식 안에서 잠깐 체험하고 지나가는 프로그램으로 소비되곤 합니다. 반면 이번 전시는 의도적으로 설계된 체험보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사이 자연스럽게 남겨진 흔적들 위에 서 있습니다. 차를 마시다 그림을 남긴 이도 있었고, 놀다 말고 종이 위에 자기 동네를 그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여행객은 쉬어가다 지나가는 바람을 한참 바라봤고, 주민들은 너무 익숙해서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던 풍경을 다시 꺼내놓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몇 해에 걸쳐 천천히 이어졌습니다. 전시에는 미술관보다 오래된 사랑방 같은 분위기가 더 짙게 남아 있습니다. 묘한 낯섦도 따라옵니다. 예술이 특정 전문가의 언어라기보다, 머물다 간 자리마다 은근히 배어든 공기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기억되는 건 그림이 아니라, 그 앞에 앉아 있던 몸의 속도 전시를 끝까지 보고 나오면 특정 작품 하나가 선명하게 남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어떤 움직임은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습니다. 종이 한 장 앞에서 괜히 시선을 떼지 못하던 뒷모습, 색연필을 고르다 손끝을 멈춘 순간, 그림을 끝내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몸의 리듬 같은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제주를 사진으로 찍고 떠납니다. 하지만 《공동의 풍경》 안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기척이 남아 있습니다. 그냥 흘려 보내지 않았던 순간들입니다.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잠시 호흡을 늦추던 움직임들입니다. 서로 이름도 모르던 이들이 같은 벽면 안에 자기 하루를 조용히 붙여놓고 간 흔적들입니다. 작은 그림들은 그렇게 서로 닿지 못한 채 한 공간 안을 천천히 부유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의 섬이 됩니다. 전시 《공동의 풍경 : 작은 그림들이 만든 큰 섬》은 저지문화지구 생활문화공간에서 오는 23일까지 이어집니다. 예술공간 둥근이 기획했고, 미술카페쌤과 예술공간 둥근이 공동 주관했습니다. 제주자치도와 제주문화재단이 후원했습니다. 고성자, 고우석, 구영웅, 권성운, 김강훈, 김미숙, 김성엽, 김영일, 김원규, 김은영, 김지혜, 김지희, 김진수, 네모(이동조), 민채현, 박진수, 안병근, 양미경, 양승윤, 오재혁, 윤병운, 윤성일, 이경미, 이경은, 이성미, 임광순, 정주연, 주한별, 최성실, 최형준, 한우섭, 현혜순, 황호석, 박지혜, 박윤경 작가와 5,000여 명의 시민들 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2026-05-1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자막뉴스] "목소리로 학생 기억하는 선생님"
서귀포중학교 / 오늘(15일) 오전 음악실이 이른 아침부터 힘찬 선율로 가득 찹니다. 학생들을 지휘하는 건 서귀포중학교 최국현 선생님. 선천적인 시각 장애를 안고 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아이들과 호흡하고 있습니다. 강진형 / 서귀포중학교 3학년 "다섯 번 정도 연습을 하면 이제 선생님이 이름이랑 목소리를 외우셔서 제가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면 선생님이 "누구누구야 왔니?" 하면서 인사를 해주시고..." 보조 장치가 있어야만 악보를 볼 수 있는 만큼 음표부터 악상 기호까지 모든 것을 외워서 수업합니다. 신체의 한계도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수업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최국현 / 서귀포중학교 교사 "꼬깃꼬깃 작은 손으로 손 편지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드릴 게 있어요. 손편지를 가져왔는데 읽어드릴까요?" 했을 때 그때가 정말 보람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꼈다는 최국현 선생님. 아이들을 가르치고 훌륭히 길러내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고준원 / 서귀포중학교 3학년 "항상 수업하실 때 힘이 없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항상 에너지 넘치게 항상 활발하게 수업을 하시는 편인 것 같습니다. 항상 저희에게 따뜻한 말로 다독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든 순간도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편견의 시선을 이겨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심은 통했고, 아이들도 선생님과 소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강경임 / 근로지원인 "선생님한테 인사할 때 안 보이시니까 바로 "이도윤입니다." "저 오승기예요." 이렇게 하기도 하고... 악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경우는 선생님 눈이 안 보이시니까 고장난 악기 부분을 선생님 손을 갖다대면서..." 학생들에게 배려와 존중의 가치를 가르치고 싶다는 최국현 선생님. 아이들에게 언제나 친근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게 꿈입니다. 최국현 / 서귀포중학교 교사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때로는 동네 형처럼, 때로는 든든한 울타리로, 때로는 웃음을 선사하는 음악 교사로 기억에 남고 싶습니다." 스승의 은혜를 기리고 감사함을 전하는 스승의 날. 사제지간의 정을 되새기며 서로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마음껏 표현하는 아이들과 최국현 선생님. 이들의 아름다운 동행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JIBS 권민지 입니다. (영상취재 윤인수)
2026-05-15 제주방송 권민지 (kmj@jibs.co.kr) 윤인수 (kyuros@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