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가 몸이 되는 순간”... 고닥, 제주에서 드러낸 파란 시간의 얼굴
예술은 경계가 흔들릴 때 가장 민감해집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고닥은 그 흔들림을 ‘파란 시간’이라 부릅니다. 낮과 밤이 스치며 남기는 짧은 푸른 틈. 빛이 꺼지기 직전이면서도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지 않은 순간. 예측이 가장 어려운 시간이자, 존재의 그림자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각입니다. 17일 개막한 개인전 ‘파란 시간(Blue Hour)’은 바로 그 틈의 감각을 다시 조립하는 시도입니다. 기술과 신화와 지형이 서로의 결을 넘나들며 하나의 신체처럼 움직이고, 인간과 비인간의 흐름은 복잡한 연결망으로 재편됩니다. 그 결합은 추상적 비유가 아니라 관람자의 몸에 직접 닿는 감각적 구조로 형상화됩니다. 제주의 동시대 미술은 지금 존재론적 탐색과 포스트휴먼적 시선, 지역 신화의 재서사화, 기술 인프라와 장소성이 만나는 지점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고닥의 전시는 이 흐름을 가장 또렷하게 밀어붙이며 단단한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지금 제주라는 공간은, 왜 이런 실험을 가능하게 할까.” ■ 제주가 하나의 몸으로 다시 등장할 때 고닥의 전시는 제주를 배경으로만 두지 않습니다. 하례리에서 용담동으로 이어지는 하천은 혈류로 보이고, 물의 흐름에서 깎여온 돌 표면은 시간이 층층이 남긴 주름처럼 다가옵니다. 이 방식은 요즘 예술계가 주목하는 신체적 장소성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자연의 형상을 시각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생명과 기술과 신화의 관계 구조를 드러내는 접근입니다. 그 층위를 예술적 감각으로 번역하면서 제주가 지리적 위치를 넘어 정체성과 존재의 구조가 다시 짜이는 장면으로 등장하도록 만듭니다. ■ 설문대 할망의 몸과 해저 케이블이 이어지는 순간의 서사 전시의 강한 축은 설문대 할망 신화를 다시 여는 대목입니다. 할망의 몸은 하천이라는 혈관, 교각이라는 뼈대, 옷의 실과 해저 케이블이라는 연결망으로 확장됩니다. 이 조합은 충돌이 아니라 서로의 결을 이어 붙이는 과정이며, 결국 새로운 신체의 형상으로 귀결됩니다.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론이 있습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Jeanne Haraway)가 1985년에 발표한 사이보그(Cyborg) 선언문입니다. 해러웨이는 당시 미국 사회가 공유하던 기술 중심적이고 남성적 성향의 사이보그 이미지를 정면으로 비틀었습니다. 공학적 기계 신체로 좁혀 이해되던 사이보그 개념을 재배열해 분류와 경계를 기준으로 작동하던 세계관 자체를 흔들었습니다. 그 결과 사물과 생명, 신화와 기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해체된 지점에서 ‘새로운 몸’이 구성될 수 있다는 해석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혼종성과 연결성을 토대로 신체성을 다시 상상하게 만드는 길을 엽니다. 고닥의 전시가 보여주는 확장된 몸의 감각은 이 지점과 정확히 포개집니다. 작가는 ‘제주’라는 장소가 가진 신화와 지형, 그리고 기술 인프라가 실제로 서로를 관통하는 순간을 세밀하게 포착해, 해러웨이가 말한 혼종적 신체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신체는 미래 기술이 만들어낼 신체 모델이라기보다, 제주의 지층과 신화적 서사, 현대적 연결망이 한데 응축된 다층적 구조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서로 다른 것들은, 겹쳐지는 순간 가장 강하게 연결된다.” ■ 세 벽면을 관통하는 3채널 영상... 관람객의 몸을 흔들다 전시장은 세 방향을 채운 영상 설치로 구성됩니다. 장면의 속도는 일정하지 않고, 소리는 서로를 넘나들며, 서사는 선형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관람객은 어느 순간 방향을 잃습니다. 이 흔들림이 전시 핵심입니다. 각기 흩어진 이미지와 소리를 스스로 꿰어야 의미가 완성되는 구조는 감상 행위를 ‘정체성 재구성’의 과정으로 바꿔놓습니다. 유동적인 자아를 탐구하는 전시에서, 보는 이들 역시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익히게 됩니다. ■ 경계 위에서 축적된 10년의 경험이 응집된 자리 작가는 약 10년 동안 독일 드레스덴과 브라운슈바익 미술대학에서 수학하며 독일과 한국을 오갔습니다. 이 기간은 전이와 흔들림과 이동의 감각을 몸으로 겪는 시간이었습니다. 2025년 독일 골드라우쉬 여성 예술가 프로젝트 선정과 2024년 카셀 다큐 앤 비디오 페스티벌 참여 등 국제 활동이 이어지면서 감각은 더욱 견고하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시간이 농축된 결과물입니다. ■ 사라지는 찰나에 남는 진실이 왜 지금 중요한가 파란 시간은 짧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존재의 윤곽이 가장 선명해집니다. 이번 전시는 사회적 전환과 기술적 변화가 겹쳐진 지금의 현실을 온몸으로 포착합니다. 확실함보다 불확실함이 더 실제에 가까워진 시대, 존재는 고정된 형태에서 벗어나 유동적인 구조로 재편됩니다. 제주가 왜 지금 실험의 장소로 다시 떠오르는지, 지역 신화는 왜 다시 호출되는지, 기술 인프라는 왜 신체적 비유로 작동하는지. 그 모든 질문이 전시 안에 응축돼 있습니다. 그래서, 파란 시간은 다시 묻습니다. 전시가 끝나도 남아, 내 안에서 천천히 오래 흔들릴지 모를 한 물음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주자치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이 후원한 전시는 30일까지, 제주시 동문로의 새탕라움에서 이어집니다. 관람은 전시기간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능합니다. 휴무일은 없습니다. 29일 오후 5시 작가와의 대화도 마련됩니다.
2025-11-20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