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제주] ② 도심이 ‘일터’가 되는 순간… 워케이션이 다시 쓴 제주의 노동 지도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제주로 들어오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기능’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일이 같이 들어옵니다. 가방만 들고 오던 이동은 노트북과 일정표를 동반한 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휴식만 가져오던 체류는 프로젝트와 회의를 함께 데려오는 체류로 바뀌었습니다. 제주는 더 이상 쉬러 오는 공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일이 이동하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관광 통계에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심의 쓰임, 건물의 기능, 공간의 배치는 이미 그 변화에 맞춰 재편되고 있습니다. 변화가 가장 먼저 ‘공간’으로 굳은 곳이 있습니다. 휴식이 아니라 일이 머무는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한 자리입니다. 제주시 탑동, 맹그로브 제주시티입니다. ■ 관광이 아니라 ‘노동 이전’... ‘워케이션’ ‘워케이션(Workation)’은 흔히 ‘휴가지 원격근무’라고 불립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더 구조적입니다. 도시가 독점하던 업무 기능이 지역으로 이동하고, 기업은 고정된 사무실을 줄이며, 노동자는 삶의 환경을 기준으로 일터를 선택합니다. 노동이 공간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도시경제 분야의 한 연구자는 “워케이션은 여행과 근무를 결합한 새로운 취향이 아니라, 일이 공간을 선택하는 방식이 바뀌는 구조적인 변화”라며 “이동 가능한 노동이 등장하면서 지역은 소비지가 아니라 생산 환경으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제주는 지금 이 변화가 가장 빠르게 실험되고 있는 장소입니다. ■ 왜 하필 제주인가 이 실험이 서울도, 판교도 아닌 제주에서 먼저 작동하는 데에는 조건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자연·도심·주거·문화가 짧은 거리 안에 밀집돼 있고, 수도권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생활비와 높은 환경 만족도가 결합돼 있으며 일상에서 충분히 떨어질 수 있을 만큼 멀면서도, 끊기지 않을 만큼 가깝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가 발빠르게 워케이션을 정책으로 수용하고 선행 모델들을 제도적으로 선보이고 있습니다. 공공이 시장보다 먼저 이 이동을 받아들인 지역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주가 실험장이 됐습니다. ■ 맹그로브는 공간이 아니라 ‘운영 모델’ 지난해 11월 제주에 들어선 맹그로브 제주시티의 의미는 숙박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도심 한가운데에 ‘일이 가능한 주거’라는 새로운 공간 유형이 생겼다는 점에 있습니다. 호텔도 아니고, 사무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원룸도 아닙니다. 일·거주·관계·이동이 분리되지 않은 구조입니다. 이는 공간 디자인보다 운영 설계의 변화에 가깝습니다. 입퇴실 시간보다 체류 흐름이 중요해졌고, 회전율보다 연결의 지속성이 더 중요한 지표가 됐습니다. 실제 운영 지표도 이를 반영합니다. 맹그로브 제주시티는 개관 이후 평균 객실 점유율 82%를 유지하고 있으며, 운영 6개월 차 이후에는 월평균 90%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올라섰습니다. 주중과 주말 점유율 차이가 거의 없는 것도 특징입니다. 관광 수요가 아니라 생활형 체류 수요가 기반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방문 유형 역시 달라졌습니다. 개인 이용자뿐 아니라 팀 단위 워케이션, 기업 워크숍, 프로젝트 단위 체류가 꾸준히 늘고 있으며, IT·콘텐츠·플랫폼·공공 연구 조직 등 업무 성격이 이동 가능한 산업군이 주 이용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맹그로브 운영사인 부동산 임팩트 디벨로퍼 엠지알브이(MGRV)의 공지영 매니저는 “입퇴실 시간보다 체류 흐름이 중요해졌고, 회전율보다 네트워크의 지속성이 더 중요한 지표가 됐다”며 “하룻밤 수익보다 반복 방문과 연결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운영의 핵심이 됐다”고 말합니다. 실제 한 기업의 워크숍 방문이 내부 추천으로 다른 팀의 추가 방문으로 이어지거나, 맹그로브 전 지점 통합 제휴로 확장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체류가 관계로 이어지고, 관계가 다시 체류를 부르는 구조가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맹그로브는 객실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체류 가능한 업무 환경을 설계하는 공간에 가깝습니다. ■ “회의도 되고, 생활도 된다”… 이용자들이 말하는 변화 현장에서 만난 정운기 에이전시 대표는 “아침에 일찍 와서 팀원들과 간단히 식사하고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 동선이 자연스럽다”며 “출장처럼 왔다가, 생활처럼 머물다 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이용 소감을 전했습니다. 단체 워크숍으로 방문한 김예찬 대표도 “보통 워크숍 공간은 회의에만 맞춰져 있고 숙박은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일과 생활이 동시에 충족된다”며 “팀 몰입도가 오히려 더 높아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용자들의 공통된 평가는 ‘편하다’가 아니라 ‘연결된다’입니다. 회의실과 객실, 식사와 산책, 업무와 휴식이 끊기지 않고 이어질 때, 일은 분리된 부담이 아니라 체류의 일부가 됩니다. 업무 공간과 숙소, 식사와 휴식이 하나의 리듬으로 연결될 때, 노동은 스트레스가 아니라 체류의 일부가 됩니다. 맹그로브가 제공하는 가장 큰 변화입니다. ■ 워케이션 소비... 관광과 다르다 워케이션 참여자의 소비는 면세점이나 패키지 상품이 아닙니다. 식사, 교통, 세탁, 운동, 문화, 로컬 서비스로 분산됩니다. 단발성이 아닌 반복 소비로 이어지고, 대기업이나 특정 영역이 아닌 지역 상권으로 흘러갑니다. 관광이 소비를 남기고 떠난다면, 체류는 관계를 더하며 반복됩니다. 그래서 지역 파급력은 오히려 더 큽니다. ■ 정책, 아직 관광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관건은 정책의 시간입니다. 시장과 노동은 이미 이동했지만, 행정은 여전히 관광 프레임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과 지표는 방문객이나 숙박일수, 항공 좌석 수 중심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서 무엇을 하며 얼마나 오래 연결되는지입니다. 주거 정책은 체류자를 고려하지 않고 임대 정책은 중기 체류자를 제도 밖에 두며, 노동 정책은 여전히 수도권 중심입니다. 이 불일치가 누적되면 체류는 구조로 정착하지 못하고 유행으로 소모됩니다. ■ 관광지를 넘어 ‘분산형 경제 실험지’로 제주는 지금 관광 구조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한국 경제의 분산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동할 수 있다면 기업도 움직일 수 있고, 기능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치가 워케이션이고, 그것이 작동하는 공간이 제주입니다. ■ 다음 단계는 ‘연결’ 이제 질문은 바뀌고 있습니다. 얼마나 왔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연결되느냐입니다. 체류가 점으로 남을지, 선과 면으로 확장될지는 리조트와 도심, 업무와 생활, 외부 인력과 지역 내부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이동이 지역 상권과 임대시장, 커뮤니티와 세대 구조에 어떤 파장을 만들고 있는지 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 변화가 누구에게 기회가 되고 누구에게 부담이 되는지 도 함께 짚습니다. 체류는 공간에 머물지만, 변화는 관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2026-01-10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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