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출렁이고, 방의 잔해가 부유한다”… 도착하지 못한 존재의 시간을 따라 걸어보았다
들어서자마자 바닥 전체는 새까만 수면으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관객이 발을 옮길 때마다 잔물결이 번지고, 그 위에 놓인 하얀 조각들은 누군가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잔여물처럼 고요히 머뭅니다. 순간,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닿아 있는가.” 박보오리 개인전 ‘닻도 없고, 돛도 없는’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예술가를 끝없이 유영하는 존재로 상상해온 오래된 신화를 지우고, 어디에도 닿지 못한 몸이 남긴 시간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사진·설치·영상 신작 4점이 이번 전시에 자리합니다. ■ 방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최소한’ 전시장에 놓인 흰 오브제들은 모두 작가가 실제로 살아온 방의 구조를 최소 단위로 압축한 형태입니다. 모양은 제각각인데, 결국 남는 것은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자리뿐입니다. 정주의 흔적이라기보다, ‘존재가 가까스로 버틴 자리’에 더 가깝습니다. 각 조각에 새겨진 길 이름은 점자로만 적혀 있어 눈으로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박보오리에게 공간은 늘 늦게 도착했고, 도착한 뒤에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관객이 조각을 만지고 옮기고 앉는 행위는 사라졌다 남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짧은 접속입니다. 그 순간 방은 집이 되지도, 폐허가 되지도 않은 채 잠정적 정박지로 머뭅니다. 박보오리는 작가노트에서 ”머무는 방식은 늘 나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래서 나는 앉을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번 전시의 시선을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 이동의 기록이 아닌, 이동이 남긴 감정의 잔향 전시장 전체에는 비행기 엔진음, 캐리어가 바닥을 긁는 소리, 도시의 바퀴가 떨며 지나가는 음들이 낮게 깔려 있습니다. 이 소리들은 특정 목적지를 향하지 않습니다. 출발도, 도착도 아닌 그 사이의 시간만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이 ‘사이의 시간’을 전시의 축으로 삼았습니다. 여러 도시를 오가며 살아온 삶에서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이 도착의 기쁨이 아니라, 멈춰 있던 순간이 남긴 묵직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음들은 이동의 배경이 아니라, 이동 과정에서 몸이 받아낸 감정의 잔향으로 남습니다. ■ ‘Noisy Night’… 붙들지 못한 신호를 향한 떨림 영상 작업 ‘노이지 나이트(Noisy Night)’는 잠들지 못하던 밤의 감각을 곧장 마주합니다. 방송이 끝난 TV 화면을 뒤덮는 흑백 노이즈, 어둠을 가르며 스쳐 들어오는 자동차 불빛, 잠들고 싶지만 잠들지 못하는 몸의 미묘한 떨림이 화면 곳곳에서 어른거립니다. 이들 영상은 기술적 오류의 기록이 아닙니다. 도착하지 않는 신호를 어떻게든 붙들어보려는 몸의 반응에 더 가깝습니다. 떨림은 혼란이 아니라 연결을 향해 반응하는, 한 존재의 방식입니다. ■ 예술가의 자유라는 말이 만든 착시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삶을 자유롭게 상상하지만, 작가가 전시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그 상상과는 다릅니다. 제주와 베를린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경험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세계가 기울어질 때마다 먼저 흔들려야 했던 몸의 일상입니다. 권주희 스튜디오126 대표는 “이번 전시는 목적지를 잃은 존재가 어떻게 버텨내는가에 관한 작업”이라며 “작가는 흔히 낭만화되는 이주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떠다니는 삶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불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그 흔들림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확장해가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관객에게 건네는 제주 과일차 한 잔 역시 그 관계의 연장입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존재들 사이에서 가능한 가장 따뜻하고 직접적인 접속입니다. ■ ‘제주‘라는 장소가 가진 또 다른 얼굴 전시는 제주를 ‘도착의 공간’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떠다니는 존재들이 잠시 머무는 지점으로 제시합니다. 베를린의 건조함과 제주의 습도가 교차하며 두 도시의 시간층위가 검은 바닥 위에서 얽히고 풀립니다. 정박과 귀환이라는 단어는 힘을 잃고, 대신 머무름과 접속의 감각이 자리 잡습니다. ■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붙드는 박보오리 박보오리는 제주를 기반으로 베를린과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며 설치·영상·사진을 통해 공간과 신체의 관계가 변하는 순간을 꾸준히 탐구해 왔습니다. 도시 구조, 건축적 압력, 일상의 움직임 같은 외부 조건이 몸의 감각을 어떻게 흔드는지 관찰하며 이를 조형 언어로 옮겨왔습니다. 이화여대 조소과를 졸업한 작가는 독일 드레스덴 조형예술대학교에서 디플롬과 마이스터슐러를 거쳤고, 베를린 예술대학교(UdK)에서 공간디자인 석사를 마쳤습니다. 뉴욕·프라하·서울·군산·부산·광주 등 다양한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라트비아·독일·미국·체코 등 여러 해외 레지던시를 통해 작업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올해 제주문화예술재단 국제 예술교류 지원사업에도 선정됐습니다. ■ 스튜디오126에서 만나는 ‘닻도 없고, 돛도 없는’ 전시는 12월 10일까지 제주시 북성로의 스튜디오126에서 이어집니다. 관람 시간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일요일은 휴관입니다. 관람료는 없습니다. 문의는 스튜디오126 또는 공식 인스타그램(@studio126_jeju)에서 가능합니다.
2025-11-29
제주방송 김지훈(jhkin@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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