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 몰라”라는 말이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
제주시 무근성 골목 안쪽, 조금 이상한 제목의 전시가 걸렸습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처음엔 체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이 말은 금세 다른 쪽으로 기웁니다. ‘모르겠다’는 고백은 무너진 사람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붙든 문장으로 다가옵니다.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열리는 이번 기획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을 크게 외치지 않습니다. 대신 육아가 남긴 반복의 선,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무게, 낯선 지역에서 다시 짜이는 관계, 사라져가는 공간과 사물의 기억,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가 함께 놓인 자리를 전시장 안으로 불러옵니다. 참여 작가는 권민오, 권혜진, 김도마, 박해빈, 이상홍, 이아람, 이애리, 이유진, 장윤하, 전선영, 정정엽, 정재훈 등 12명입니다. 회화와 드로잉, 영상, 오브제, 입체 설치 등 50여 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전시는 자기를 명확하게 소개하라는 시대의 요구 앞에서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아직 이 물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머뭇거림이 오히려 가장 강한 힘입니다. ■ 이름 붙이기 어려운 삶을, 먼저 알아보는 작품들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물음의 크기가 아니라, 그 말이 놓이는 자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장은 오래됐습니다. 너무 자주 쓰였고, 그래서 쉽게 비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누군지 몰라》는 이 말을 책상 위 개념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자기 삶에서 피할 수 없었던 시간, 관계, 몸의 기억, 반복되는 노동, 지역과 이동의 경험을 화면과 사물, 영상과 설치 안으로 가져옵니다. 권혜진 은 제주로 이주한 뒤 육아와 일상이 겹치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선과 패턴의 이미지를 페인팅으로 이어갑니다. 이아람 은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노동과 소외의 자리를 시각화합니다. 정정엽 은 보이지 않는 여성의 노동과 삶을 오래 응시해온 흐름을 이번 전시로 끌어옵니다. 전선영 은 조각과 미술심리치료를 공부하고 신경다양성 아이들과 함께해온 경험을 작품으로 확장합니다. 정재훈 은 현실의 풍경을 초현실적인 화면으로 바꾸며 익숙하다고 믿었던 세계 안쪽의 낯섦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자기 존재는 완성된 답안이 아닙니다. 계속 바뀌고, 흔들리고, 관계 속에서 다시 쓰입니다. 하나의 이름으로 자신을 고정하기보다, 삶의 변화와 관계의 압력 속에서 다시 구성됩니다. 그렇다고 전시는 이 말을 어렵게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각자의 작품이 이미 그 설명을 대신합니다. ■ 거대한 주제보다, 오래 바라본 사물과 관계가 먼저 온다 《내가 누군지 몰라》는 하나의 주장으로 작품들을 몰아가지 않습니다. 그 점이 오히려 전체의 밀도를 만듭니다. 권민오 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새로운 공간에서 생기는 만남과 이별의 순간을 영상으로 다룹니다. 이유진 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사라져가는 공간과 사물, 동물에 대한 애정을 오브제와 영상 설치로 풀어냅니다. 장윤하 는 공존하는 생명체에 대한 관심을 자기 언어로 옮깁니다. 이애리 는 삶 주변의 풍경을 평면 위에 담담하게 옮깁니다. 박해빈 은 청주의 ‘APT 빈공간’을 운영하며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실험합니다. 김도마 는 제주에서 조각과 입체 작업을 이어가며 물질과 형태가 만들어내는 긴장을 탐색합니다. 이들 작품은 서로 닮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잘 보입니다. 한 전시 안에서 12명의 작가가 각자의 언어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획이 너무 강하면 작품은 주제의 설명 자료가 되고, 반대로 느슨하면 전체가 흩어집니다. 이번 전시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습니다. 차이를 억지로 정리하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드러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 결과 전시 제목은 개인의 혼란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삶이 한 공간에 놓였을 때 비로소 보이는 오늘의 복잡한 표정을 보여줍니다. ■ 무근성의 빈공간, 골목의 시간이 작품 사이로 들어오다 장소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은 제주시 관덕로3길, 무근성 마을 안에 있습니다. 대형 미술관이나 상업 갤러리의 매끈한 동선과는 결이 다른 곳입니다. 관람객은 골목을 지나고, 오래된 도시의 시간을 통과한 뒤 전시장에 발을 디딥니다. 이 입지는 전시의 방향성과 맞물립니다. 전시가 붙드는 것은 완성된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살던 곳을 떠나온 사람의 시간, 돌봄과 노동을 반복해온 몸의 기억, 사라지는 공간을 지켜보는 시선,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 한곳에 놓입니다. 그런 말들은 번쩍이는 전시장보다 생활의 흔적이 남은 공간에서 더 또렷하게 들립니다. 물론 작품들이 모두 이 장소를 위해 제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근성 골목과 빈공간이라는 장소는 이번 전시를 읽는 방식에 분명한 층위를 더합니다. 작품이 놓이는 자리가 배경에 머물지 않고, 감상 방식과 의미를 함께 바꾸는 순간입니다. ‘빈공간’이라는 이름 역시 묘합니다. ‘비어 있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자리라는 뜻까지 품고 있습니다. 전시는 그 빈자리에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문장을 놓습니다. ■ 모른다는 말이 예술의 시작이 되는 순간 《내가 누군지 몰라》는 명확한 결론을 주지 않습니다. 자신을 너무 빨리 설명해버리는 사회에서, 아직 말로 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조금 더 오래 붙들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존재는 이름과 이력으로 정리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돌봄의 시간이고 손에 남은 노동의 기억이며, 떠나온 장소의 잔상이면서 함께 살아온 생명체의 온기입니다. 그래서 이 제목은 나약한 고백으로 다가서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모른다는 말은 끝이 아닙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그 말이 사라지지 않도록,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가만히 붙들고 있습니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제주시 관덕로3길 15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열립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이며, 월요일은 쉽니다. 관람은 사전 예약제로 진행됩니다.
2026-05-08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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