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오라”는 대통령의 신호… 그런데 제주는 불리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반도체 기업들을 향해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전력과 산업, 지역을 하나의 축으로 묶은 첫 정치적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쪽’ 어디에도, 대한민국 재생에너지 전환의 실험장으로 거론돼 온 제주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우연한 누락이 아니라, 현재 국가 산업 전략의 중심축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 재생에너지는 이제 ‘환경’이 아니라 ‘산업의 조건’ 그동안 재생에너지는 기후 위기 대응과 탈탄소라는 환경 정책의 언어로 설명돼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 발언은 그 구도를 넘어서는 메시지로 해석됩니다. 재생에너지는 이제 기업의 투자 판단을 좌우하는 전제 조건이자, 산업 입지를 가르는 핵심 인프라로 올라섰습니다. 이 대통령은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참석 기업들을 향해 “기업은 자본 논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며 세제, 규제, 인프라, 인력 정주 여건까지 함께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정부는 곧바로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AI 반도체 투자, 광주 패키징 허브, 데이터센터 수요 확대 구상을 잇따라 내놨습니다 ■ “재생에너지는 남쪽으로”… 산업 생태계 재편을 직접 언급 대통령은 같은 자리에서 “균형 발전을 위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 그 지역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기업은 기본적으로 자본 논리로 움직일 수밖에 있어 선의에만 기대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기업 입장에서도 유용한 선택이 될 수 있도록 세제, 규제, 인프라 구축, 인력 공급과 정주 여건까지 정부가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산업 생태계 전반에 대해서는 “국가 정책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 대전제”라며 “그 파이가 다양하게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바람직하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좁고 작게 파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넓고 깊게 파는 길을 택했으면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소재·부품·장비 등 후방 산업에 대해서도 “해외 의존도가 높은 분야에 대한 관심이 함께 커져야 산업 생태계가 튼튼해질 수 있다”며 “생태계 기반이 갖춰져야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 이 길을 가장 먼저 연 곳, ‘제주’지만 제주는 2012년 ‘탄소 없는 섬’을 선언하며 가장 먼저 에너지 전환의 전면에 섰습니다. 풍력과 태양광, 해상풍력 상업 운전, 스마트그리드, 분산형 전력망, 도민 참여형 공공풍력까지 재생에너지 정책의 주요 실험은 거의 모두 제주에서 먼저 진행됐습니다. 전국 풍력 설비의 상당 비중이 제주에 집중돼 있고, 변동성 대응과 계통 안정화 기술도 이곳에서 검증됐습니다.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말이 구호가 아니라 제도로 구현된 지역 역시 제주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이 그린 새로운 산업 지도에서, 그 제주의 이름은 논외로 밀려난 모습입니다. ■ 호남은 불렸고, 제주는 빠져… 이유는 ‘구조’ 광주와 전남은 지금 ‘산업화가 가능한 재생에너지 지역’으로 묶이고 있습니다. 대규모 육상·해상풍력,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패키징, 산업단지와 전력 수요가 하나의 구조로 설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주 상황은 다릅니다. 전력은 충분한데 이를 담아낼 송전 계통 여력이 부족하고, 대기업이 들어올 산업형 부지는 구조적으로 제한돼 있으며, 전력이 곧바로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물리적 연결 고리 또한 취약한 상태입니다. 제주는 현재 에너지 실험에서는 성과를 축적했지만, 산업 구조는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발언에서 드러난 공백은 바로 이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 제주에 ‘기회’이자 동시에 ‘경고’ 대통령의 메시지는 제주에 두 가지 시사점을 동시에 던집니다. 재생에너지가 산업 전략의 중심으로 올라온 순간, 제주가 쌓아 온 실증 자산은 언제든 국가 핵심 자산으로 재편입될 수 있는 여지, 즉 기회를 다시 얻었습니다. 그린수소, RE100 산업단지, 분산에너지 특구 구상도 다시 정책 테이블 위로 올라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는 동시에 경고이기도 합니다. 지금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제주는 전력을 만들어 육지로 보내는 전력 공급지로만 고착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산업은 육지에서 키우고, 계통 불안과 환경 부담은 제주가 떠안는 구조가 굳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대통령의 ‘남쪽’, 지역 경쟁이 아니라 ‘준비된 지역’의 기준 이번 발언은 지역 간 우열을 가르기 위한 메시지라기보다, 누가 산업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선에 가깝습니다. 재생에너지라는 조건이 산업 입지의 전제가 된다는 점을 공식화하면서, 지역의 ‘준비 수준’이 산업 지도에 직접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제주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현재 제주는 산업을 끌어들이는 재생에너지 지역인지, 아니면 전력만 공급하는 재생에너지 지역인지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 답은 더 이상 선언이나 계획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계통 확충, 산업형 부지 확보, RE100 클러스터 조성, 그린수소의 상업화 구조 구축이라는 구체적 선택에서 결과가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주는 그 분기점에 올라서 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에너지 전환에 뛰어들었고, 가장 많은 실증을 거친 지역이 제주입니다 그러나 산업 전략의 지도는 성과나 상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 국면에서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전력과 산업이 실제로 맞물릴 수 있느냐가 지역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으로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에서 ‘제주’가 호명되지 않았다는 점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제주가 에너지와 산업 정책의 좌표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실 지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 구조가 바뀌지 않을 경우, 제주는 ‘선도 지역’이 아니라 전력을 공급하는 외곽 지역으로 고착될 가능성도 함께 거론되면서, 향후 정책 설계와 대응을 둘러싼 고민은 더 깊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2025-12-10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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