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 시간을 늦추는 선택… “여행을 소비하지 않고 머무는 방식, 여기”
겨울 제주를 둘러보며 곧바로 느껴진 건 목적지 소개가 아니라, 머무는 시간 자체가 여행의 핵심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빠르게 이동하기보다, 한 자리에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도록 여백을 둔 제안. 그 방향은 올해 가장 뚜렷했습니다. ■ 목적지보다 체류가 먼저였다 이번 겨울, 박물관·전시관·독립서점이 전면에 오른 이유는 단순히 콘텐츠 소개를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 어디를 찍고, 무엇을 본 뒤 빠져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머물며 시간을 흡수하는 여행이 제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실감영상 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사람, 고래 뼈를 바라보며 대화를 접은 관람객, 서점 창가에 앉아 긴 시간을 보내던 이들. 그 정적의 장면들이 이번 겨울 여행의 성격을 대신 보여줍니다. 제주관광공사는 올해 겨울 콘텐츠의 의도를 “여행객이 스스로의 속도로 제주를 받아들이고 오래 머물 수 있는 여유를 만들고 싶었다”라며 “오늘 일정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가 당연하게 존재하고, 이번 겨울 제시된 여행 동선은 그런 여지를 열어두는데 있다”고 전했습니다. ■ 풍경보다 체온 겨울 제주 여행의 안내문 한가운데엔 화려한 설명보다 몸이 반응하는 감각이 놓여 있습니다. 먹돌에서 느껴지는 미열, 감귤 오일 마사지에서 번지는 향, 찻잔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확인하는 시간까지. 이건 정해진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라기보다, 몸 안에 남아있던 긴장을 천천히 내려놓는 동선이었습니다. 티 클래스를 듣고 편지를 쓰거나, 낯선 이의 문장을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보는 시간은 ‘체험’이라는 이름보다 묵혀둔 자신의 시간과 대면하는 자리에 가까웠습니다. ■ 동백과 눈은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서귀포의 동백꽃은 설명을 붙이기도 전에 시선으로 먼저 파고듭니다. 빛을 받아 번지는 붉은색, 땅 위에 쌓인 꽃잎의 색조, 그 아래 잠시 멈춰 선 사람의 움직임까지. 한라산에 내린 눈 역시 비슷한 울림을 남깁니다. 발끝에 닿는 질감, 얼음막이 남기는 여린 흔적, 숨이 고르게 흩어지는 능선 위의 아침. ‘겨울이 왔다’는 표현조차도 필요 없게 만드는 풍경들은 설명하기보다 직접 마주한 순간의 정적을 남기도록 안내합니다. ■ 하나로마트에서 확인한 생활의 층위 여행 테마 안에 하나로마트가 오른 건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들러보면 이 선택이 왜 겨울 제주 여행의 리스트 안쪽에 놓였는지 곧바로 이해됩니다. 노형점의 상품 배열, 하귀점 수산 코너에 쌓여 있는 비늘의 반짝임, 위미에 널린 감귤 품종, 안덕의 빵 냄새가 퍼지는 새벽. 라벨의 정보, 가격대, 진열 방식, 손이 닿고 나오는 온기까지도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 리듬이 오롯이 배어 있습니다. 여행자는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공간은 제주의 일상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장소가 됐습니다. 관광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매일을 통과하는 자리로 남습니다. ■ 국수 한 그릇과 계절의 공기 겨울 제주에서 고기국수는 그 자체로 계절의 언어였습니다. 면의 질감, 국물의 농도, 지방향, 제주시와 서귀포가 각기 다르게 담아낸 간의 방향 모두. 멀리 움직이지 않아도, 뜨거운 국물 앞에서 잠시 식혀간 호흡이 제주 여행의 기억을 대신했습니다. 한라산으로 향하기 전 휴게소에서 먹던 김밥과 어묵 국물도 같은 자리에 놓입니다. 체온을 되돌리고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짧은 순간. 한 끼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겨울이라는 계절에 가만히 섞여가는 통로였습니다. ■ 비양도에서, 올레에서, 숨비해안로에서 비양도 앞선 바람의 결, 돌담이 만든 선과 바다의 방향. 이 움직임들은 관광지의 목록이라기보다, 섬을 둘러싼 질서에 가까웠습니다. 올레길에서는 길보다 걷는 몸이 주변을 재정리했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달라지던 공기 밀도, 멈춰 섰을 때만 들리던 소리, 걷는 동안 몸과 함께 바뀌어가는 감각들. 구좌읍 숨비해안로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흘러가던 빛, 바람이 바뀌는 순간, 체온이 미묘하게 바뀌는 구간들도 또렷했습니다. 감귤 따는 체험에선 오히려 손놀림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껍질을 벗길 때의 결, 병에 차갑게 닿는 귤청, 반죽에 스며드는 소리.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한 걸음씩 기록이 쌓여갔습니다. 겨울 제주는 목적지를 찍는 기록이 아니라,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감각의 흔적이었습니다. 시간을 재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행법이 이 계절의 중심에 놓였습니다. 그 여백 속에서 겨울 제주를 만나는 일. 이번 시즌 제주가 여행객에게 건넨 가장 조용한 선언이었습니다.
2025-12-05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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