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중반 자갈길이던 5.16도로 (제주도 건설사, 김중근)
한라산은 요즘도 매일 2천명 가까운 탐방객이 찾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엔 125만명이나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한라산 등산로 주변 훼손이 심각해지자, 2016년 탐방 예약제를 시행하면서 그나마 탐방객 숫자가 줄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난해 65만명이 한라산을 찾았습니다.
과거 한라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던 산이 아니었습니다.
옛 제주인들에게 한라산은 신령스러운 구역으로 여겨졌습니다.
제주의 수 많은 설화들이 한라산과 연결돼 있는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라산에 대한 이런 인식은 쉽게 접근할 수 없던 곳이었기 때문에 더 강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라산과 연결된 길다운 길이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 한라산의 임산자원을 수송하기 위해 마차가 다닐 정도의 도로가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10만명이 넘는 일본군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주둔하자, 군수물자 수송하기 위해 보수하면서 차량 통행이 부분적으로 가능해졌습니다.
한라산을 지나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길이 만들어졌지만, 비포장의 자갈길이었고 중간중간 끊겨 있었습니다.
게다가 해방 이후 제주 4.3이 발생하면서 8년간 한라산 출입이 통제됐고, 그 사이 비포장 도로 상당 구간이 원시림으로 뒤덮여 버렸습니다.
한라산은 여전히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남게 됐습니다.
확장된 비포장 5.16도로. 한라산으로 향하는 등산객(제주 옛 모습[제주시])
그러다 1957년 제주시와 서귀포시 횡단도로 복구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원시림을 걷어내고, 끊어졌던 도로를 4년에 걸쳐 다시 연결시켰습니다.
그렇게 45킬로미터의 한라산 첫 횡단도로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포장 도로였고, 도로폭도 4~5미터에 불과했습니다.
간간이 한라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불편한 도로였습니다.
한라산이 사람 곁에 가까이 다가오게 된건 1962년, 아스팔트 포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부터입니다.
1962년 제주-서귀선 횡단도로(5.16도로) 포장 공사 기공식
비포장의 좁은 도로를 폭 6.5미터로 확장하는 포장 공사가 1962년 3월 시작됐습니다.
포장 공사 기공식엔 제주도민이 2만여명이나 참석할 정도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난공사 끝에 한라산 첫 횡단도로 포장공사는 1963년 10월 마무리되고,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아스팔트 포장된 5.16도로 (제주도 건설사, 김중근)
당시엔 이 도로는 제주-서귀선 횡단도로가 공식 명칭이었습니다.
제주-서귀선 횡단도로가 굽이굽이 돌아가는 좁은 '아리랑 길'이었지만, 그래도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조금은 사람과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곡선 구간이 많았던 5.16도로 '아리랑길'
그 이후 계속 도로를 확장하고 직선 구간을 늘리면서, 한라산과의 거리감은 더 줄게 됐습니다.
이젠 5.16 도로로 이름이 바뀐 제주-서귀선 횡단도로가 한라산을 사람과 친숙한 공간으로 바꿔놨지만, 옛 제주인들이 신령스런 공간으로 여겼던 한라산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나타나게 만든 셈입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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