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 바로 뒤에 위치한 '사라봉' [비짓제주]
제주항 바로 뒤쪽으로 높이 143m의 오름인 사라봉이 솟아 있습니다.
사라봉은 인근 주민들이 산책을 하고 운동하러 오가는 도심공원입니다.
하지만 사라봉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휴식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사라봉 일대가 거대한 공동묘지였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말까지 있었던 '사라봉 공동묘지'. 현재 우당도서관과 국립제주박물관 인근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제주도]
사라봉은 제주읍성 밖에서 가장 가까운 오름이라, 오래전부터 무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무덤이 늘어나면서 대규모 공동묘지가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더욱이 상당수가 누가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연고 분묘였습니다.
긴 세월 수많은 상여들이 사라봉 공동묘지로 향하던 길이 바로 '사라봉 길'입니다.
사라봉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던 '사라봉 길'
사라봉길은 떠나는 이들에게 인생의 끝을 알리던 길이었던 셈입니다.
사라봉 공동묘지엔 1970년대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분묘가 생겨났습니다.
한때 파악된 무연고 분묘만도 7천기가 넘었을 정도였습니다.
사라봉에 공동묘지가 생기면서 바로 옆으로 참전용사와 국가유공자 분묘들이 들어서면서 제주시 충혼묘지까지 생겨났습니다.
사라봉 앞쪽으로 조성돼 있던 제주시 충혼묘지[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제주도]
국립묘지도 아닌 제주시가 만든 시립 묘지였지만, 200여기의 국가 유공자 묘가 안치됐습니다.
전사한 아들과 남편을 다른 지방 국립묘지에 안장하느니, 가까운 곳에 안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1961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까지 제주시 충혼묘지를 찾아, 최대한 예우를 갖춰 조성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1961년 제주시 충혼묘지 방문해 지시하는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제주도]
제주에 처음 생겼던 충혼묘지를 찾아가던 길 역시 사라봉길 이었습니다.
사라봉 길은 인생의 끝으로 향하던 길이면서도,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알리던 길이기도 합니다.
1980년, 사라봉길을 따라 사라봉을 찾는 신혼부부들이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1980년대 사라봉을 찾아 결혼 기념 식수를 하는 신혼부부들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제주도]
사라봉 중턱에 올라 결혼을 기념하며 나무를 심는 행사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로 신혼여행을 왔던 신혼부부들이 사라봉에 결혼 기념 나무를 심고, 표지석까지 세웠습니다.
제주도내 신혼부부들은 아예 결혼 예복을 갖춰 입은 채 사라봉에 올라, 직접 나무를 심었습니다.
당시 충혼묘지 뒷편의 사라봉이 민둥산이라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라는 윗선의 방침이 있었고, 신혼부부들이 사라봉에 나무를 심는 기념 이벤트가 마련됐던 겁니다.
그렇게 사라봉에 심겨진 기념식수가 1,600여그루나 됩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나무를 심고 사라봉길을 걸으며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신혼부부들이 사라봉에 심었던 나무들.
결혼 기념 식수를 한 후 설치했던 표지석
30여 년 전 신혼부부들이 심었던 향나무와 동백나무들은 이젠 키가 3m 가까이 자라 사라봉에 짙은 녹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당시 설치해 둔 표지석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결혼 기념식수 행사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신혼여행 패턴이 바뀌면서 사라지게 됐습니다.
1980년대 신혼부부들이 사라봉에 심었던 나무들.
제주시 도심이 확장되면서, 사라봉 공동묘지와 충혼묘지도 옮겨졌습니다.
1976년 제주시가 한라산 중턱 아흔아홉골에 제주시립 공설묘지를 조성하면서, 사라봉 공동묘지에 있던 모든 분묘를 이장했습니다.
사라봉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엔 우당 도서관과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시 청소년 수련관과 국민생활체육센터가 들어섰습니다.
제주시 충혼묘지도 1980년 시립 공설묘지 인근에 충혼 묘지가 만들어 지면서 옮겨갔습니다.
충혼 묘지가 있던 자리는 1993년부터 몇년간 제주시 민속 오일시장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제주시 충혼묘지가 있었던 자리엔 시민축구장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시민 축구장이 만들어져, 충혼묘지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라봉은 바로 옆 별도봉과 함께 공원으로 지정돼, 이젠 시민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랜 세월 장례객과 신혼부부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인생의 끝과 시작이 공존했던 사라봉 길은 이젠 간간이 산책객들이 찾는 잊혀진 길이 돼 버렸습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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