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제주종합경기장 주경기장 모습. 관중석도 현재 절반 규모고, 본부석 스탠드도 정반대쪽에 작게 만들어져 있다.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현재 제주시 오라동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1만 6천여명.
5, 6년 전부터 공동주택이 계속 들어서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는 지역입니다.
오라동은 19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농경지 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아픈 현대사를 겪은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
제주 4.3 발생 초기였던 1948년 5월 1일 당시 제주읍 오라리 연미마을에 방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익단체가 불을 질렀다는 자작극 논란 속에도 이승만 정부와 미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강경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몇 달 만에 죄 없는 양민까지 수천 명을 검거하고 학살했습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한라산에 숨어 있는 무장대를 돕고 있다며, 강제 소개 명령을 내려 마을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 혼란기 속에 오라동은 사는 사람이 없고,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 돼 버렸습니다.
그 여파는 20년이나 이어졌습니다.
닫힌 공간이 돼 버렸던 오라동이 다시 열린 공간으로 바뀌게 된 건 1967년입니다.
제주 공설운동장이 오라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제주시청 앞에 있던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행사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스탠드도 없는 볼품없는 운동장이었습니다.
그래도 제주에선 가장 큰 운동장이었고, 체육 대회와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제주시 도심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1967년 1월 제주시청 앞 공설운동장은 폐쇄됐습니다.
1967년 10월 제주시 오라동에 조성된 제주공설운동장 부지. 4차선 공설로가 함께 만들어졌다. 오라동 일대는 대부분 농경지였다.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그리고 같은 해 10월 제주시 오라동에서 제주공설운동장 신축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농경지뿐이던 오라동에 공설운동장 부지가 조성되고, 처음으로 곧게 도로가 뚫렸습니다.
닫혀 있던 오라동을 열어 준 4차선 도로가 지금의 공설로입니다.
오라동에 들어선 공설운동장은 1970년 5월 완공됐습니다.
1970년 5월 완공된 제주공설운동장. [사진으로 본 제주역사]
그러나 규모는 초라했습니다.
스탠드도 현재 위치와 정반대인 동쪽에 작게 만들어졌습니다.
운동장에 잔디가 입혀진 것도 5년이 지난 1975년이었습니다.
그래도 운동장다운 운동장이 생기면서 새로운 스포츠 행사가 잇따라 열리게 됐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오토바이 경주대회가 열린 적도 있습니다.
제주공설운동장에서 열란 오토바이 경주대회(Pete Demarco)
공설로를 따라 많은 선수와 관중들이 공설운동장을 찾았습니다.
공설로 주변 개발에 가속도가 붙게 된 건 제주에서 처음 전국소년체전이 열린 1984년부터였습니다.
공설운동장은 대대적인 증축공사가 진행됐습니다.
관중석 규모를 2배로 늘리고, 본부석 스탠드도 반대편 서쪽으로 옮겼습니다.
개회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한라산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옮겨졌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실내체육관과 수영장, 야구장, 보조경기장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현재 제주종합경기장 주변 오라동 일대 [제주시 체육회]
그때부터 제주 공설운동장이란 이름은 사용되지 않게 됐습니다.
대규모 스포츠 타운이 만들어지면서 제주종합경기장으로 불려지게 됐습니다.
제주시 오라동에 들어선 제주 공설운동장은 열악했던 제주 스포츠 성장의 물꼬를 트고, 아픈 역사 속에 닫여 있던 오라동을 다시 열어준 역할을 해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강석창(ksc064@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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