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Zoom'은 제주에 대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알고 있다고 하기엔 애매한 '그 무언가'를 풀어주는 코너입니다. 박식한 수준까진 아니지만 애매한 '그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긁어줄 수 있도록 준비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어느덧 3월이 됐고, 제주는 봄꽃도 만연하게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느 때가 그랬듯, 따뜻한 봄이지만 가슴 한켠은 여전히 시린 것이 제주입니다.
바로 제주4·3 때문인데요. 제75주년 추념식도 어느덧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75주년을 앞두고 최근 제주에서는 4·3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캠페인도 나오고 있고, 이달부터는 제주 곳곳에서 관련 내용이 종종 보일 것 같습니다.
4·3의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적어도 관련 홍보물을 볼 때 '저게 그거구나' 정도는 알 수 있도록 세계기록유산 측면에서 간단하게 정리해봤습니다.
■ 시대의 광풍이 앗아간 아버지.. 일흔을 넘긴 딸은 처음으로 울었다
4·3 유족인 문혜형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태어나고 2개월 뒤 아버지가 대구형무소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나이는 당시 22살(수형인명부 기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흔적은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 3장이 전부입니다.
문혜형씨 가족은 겨우내 먹으려 저장해둔 쌀을 팔아 영치금을 보내는 등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내에게. 아아 꽃피는 봄철도 지나고 더운 여름철이 돌아왔네 ... 고맙게도 보내준 금전과 소포를 잘 받았으니 안심하게나. 즉시 답장할 마음이 있어도 자유로이 엽서를 구하지 못하므로 회답 못하였네 ... 늙은 어머님 생각과 어린애 생각이 가슴에 가득하고 있다 ... 앞으로 집안 소식을 매달 알려주기를 부탁하네. 그리고 사랑하는 옥녀야, 나는 네 생각만 나고 있다. 자주 편지를 부탁한다"
아버지가 보낸 엽서에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옥녀는 문혜형씨의 어릴적 이름으로, 100일도 되지 못한 딸을 두고 떠난 아버지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죠.
아버지는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시대의 광풍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어 대부분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감됐는데,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재소자 대부분은 학살로 행방불명 됐습니다.
그렇게 엽서는 끊겼고, 아버지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가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아버지를 찾아 다녔고,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도 아버지가 보낸 3장의 엽서는 항상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렸던 딸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문 씨는 어머니에게 "이제는 버리자. 버려도 되지 않느냐"고 울며불며 따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니다. 아버지가 온다 했는데 이것을 왜 버리느냐"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9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문혜형씨 역시 어머니처럼 엽서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들었던 어머니의 말처럼 언젠가 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문혜형씨는 "아버지의 근거가 이거(엽서)라서, 만약에 좋은 세상이 오면 이걸로 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이제까지 간직했던 거예요"라고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지난해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미 일흔을 훌쩍 넘긴 딸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보관만 하던 엽서의 내용도 처음으로 읽어봤고, 이내 목놓아 울었습니다.
■ 동아시아 작은 섬에 새겨진 냉전의 상흔.. 그리고 화해
제주4·3평화재단에서 보관 중인 엽서는 문 씨 아버지의 것을 포함해 모두 15장.
문 씨의 아버지처럼 한 명이 여러장을 보낸 것도 있습니다.
당시에 글을 알고 엽서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쉽지 않았고, 또 글을 읽는건 성인쯤은 됐어야 했기 때문에 엽서의 주인공들은 이제 세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남아 4·3 진상규명 과정에 힘을 실었고, 이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4·3특별법이 만들어져 대통령의 공식 사과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수형인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보상 작업까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의 힘입니다.
문혜형씨 아버지의 엽서를 포함해 4·3이 담긴 기록물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이 본격화 된 것이 바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도전입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4·3기록물은 우선 3·1 결정서를 비롯한 4·3 당시의 기록물이 있습니다.
특히 당시 군사재판에 회부돼 수형과 사형을 언도 받은 2,530명 민간인들의 명단과 인적사항을 쓴 '수형인명부'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4·3 이후에 나온 유족의 증언부터 4·3특별법 개정이 이뤄지기까지의 자료도 포함됩니다.
정확한 갯수로는 3만 건이 조금 안됩니다만 3만 건 정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4·3 기록물의 가치를 말하자면 크게 2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는 당시 세계적인 냉전 상황이 동아시아의 작은 섬에서 압축돼 그대로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이후인데, 소위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해결방식이 아닌, 주민들이 스스로 치유와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는 점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미워하는 감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마음을 누르고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4·3의 정신으로 불리는 화해와 상생인 것이죠.
이런 모습이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과거사 해결에 있어서도 모범 사례로 평가받기 때문에 유네스코를 통해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 기록은 과거 넘어 현재·미래에도 여전히 '유효'
지금까지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은 적다곤 할 수 없습니다.
124개국에서 432건이 올라 있습니다.
몇 가지 꼽아보라면 1215년에 선포된 '마그나 카르타'와 체 게바라의 기록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d단조 등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등재시킨 나라는 24건의 독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16건이 등재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동의보감, 난중일기 등 옛 자료부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등 현대사 자료도 있습니다.
이 와중에 국가폭력 관점에서 4·3과 유사점을 보이는 것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꼽을 수 있겠네요.
5·18은 지난 2011년 등재됐는데, 특이점은 정부채널을 통하지 않고, 시민들 주도로 NGO(비정부)채널로 등재가 된 것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고로 5·18은 유네스코 등재 이후 기록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록관이 만들어진 점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영향은 기록물의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특히 높아지는 계기가 됐고, 현재까지도 새로운 기록물들이 기증되고 있습니다.
또 기록관에서도 실제 기록물과 내용은 물론 외형까지 똑같은 복본을 만들어 일반에 꾸준히 전시하고 있습니다.
실제 기록물은 보관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 일반에 보여 질 수 없기 때문인데, 복본을 만들어서라도 대중과의 접근성을 늘린 겁니다.
■ "4·3을 위해, 당신의 10초만 내어주세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격년제로 이뤄지고, 정부채널을 통할 경우 각 회원국에서는 최대 2건을 제출할 수 있습니다.
제출은 문화재청에서 하는데 이번에 공식적으로 제출 의사를 보이는 것은 제주4·3을 비롯해 3·1운동 기록물, 또 산림녹화 50주년을 기념한 기록물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공공연히 등재를 추진한다고 들려오는 기록물만 10건 정도 됩니다.
모두가 훌륭하고 가치 있는 기록물들이기 때문에 어쩌면 유네스코 본 심사보다 예선격인 문화재청 심사가 더 까다로울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대한 평가가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감은 있고, 등재 유산 수도 많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세계기록유산이 주는 상징성은 대체 불가능입니다.
제주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도전은 공식적으로는 처음이지만, 사실 처음은 아닙니다.
10여 년 전인 지난 2012년 즈음부터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필요성을 꺼냈고, 2018년 제주자치도 차원에서 본격적인 등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국 위안부 기록' 등재 추진과 관련해 일본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유네스코 차원의 절차가 멈춰서며 실제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지난 2021년 심사가 다시 시작됐지만 이미 국내 심사를 통과한 '4·19혁명'과 '동학농민운동' 기록물이 이미 대상에 올라 있어서 도전 할 수 없었고, 이번에 다시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도 등재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힘 모으기에 나섰습니다만, 전망이 밝다고만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유형의 일은 논란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은데, 갑자기 4·3에 대한 전국적인 이슈에 철 지난 '김일성 지시' 발언으로 메워졌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노력해 온 입장에서 보면 이 '뜬금포' 논란은 찬물을 끼얹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껏 4·3을 흔드는 단체 입장에선 좋은 먹잇감이 된 셈이라, 문화재청에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5·18 역시 등재 직전까지 북한군 개입설로 시달렸지만 끝내 등재됐기 때문에 흔드는 시도가 반드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흔들기는 곁가지일 뿐이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4·3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 가치는 충분한 만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등재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겠죠.
그래서 제주자치도도 4·3종합정보시스템(https://peace43.jeju.go.kr/)을 통해 유네스코 등재 온라인 응원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사전심사가 다음 달 말로 예상되는 만큼, 이 기간 4·3 75주년 추념식을 비롯해 4·3 알리기에 특히 더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길다면 길 수 있는 이 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4·3종합정보시스템에 들어가 응원 캠페인에 응원의 말 한 줄을 부탁드리고 싶네요.
이름과 사는 지역을 선택하고, 한마디 글을 남기면 되는데, 10초 정도면 충분합니다.
작은 글 한 줄이지만, 분명 제주4·3에는 큰 힘이 될 겁니다.
JIBS 제주방송 이효형 (getstarted@hanmail.net)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4·3평화공원
어느덧 3월이 됐고, 제주는 봄꽃도 만연하게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느 때가 그랬듯, 따뜻한 봄이지만 가슴 한켠은 여전히 시린 것이 제주입니다.
바로 제주4·3 때문인데요. 제75주년 추념식도 어느덧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75주년을 앞두고 최근 제주에서는 4·3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캠페인도 나오고 있고, 이달부터는 제주 곳곳에서 관련 내용이 종종 보일 것 같습니다.
4·3의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적어도 관련 홍보물을 볼 때 '저게 그거구나' 정도는 알 수 있도록 세계기록유산 측면에서 간단하게 정리해봤습니다.
문혜형씨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유일한 사진, 사실 사진이 아니고 비슷하게 그린 그림이다.
■ 시대의 광풍이 앗아간 아버지.. 일흔을 넘긴 딸은 처음으로 울었다
4·3 유족인 문혜형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태어나고 2개월 뒤 아버지가 대구형무소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나이는 당시 22살(수형인명부 기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흔적은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 3장이 전부입니다.
문혜형씨 가족은 겨우내 먹으려 저장해둔 쌀을 팔아 영치금을 보내는 등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내에게. 아아 꽃피는 봄철도 지나고 더운 여름철이 돌아왔네 ... 고맙게도 보내준 금전과 소포를 잘 받았으니 안심하게나. 즉시 답장할 마음이 있어도 자유로이 엽서를 구하지 못하므로 회답 못하였네 ... 늙은 어머님 생각과 어린애 생각이 가슴에 가득하고 있다 ... 앞으로 집안 소식을 매달 알려주기를 부탁하네. 그리고 사랑하는 옥녀야, 나는 네 생각만 나고 있다. 자주 편지를 부탁한다"
문혜형씨의 아버지가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 사본
아버지가 보낸 엽서에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옥녀는 문혜형씨의 어릴적 이름으로, 100일도 되지 못한 딸을 두고 떠난 아버지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죠.
아버지는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시대의 광풍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어 대부분 다른 지역 형무소로 이감됐는데,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 재소자 대부분은 학살로 행방불명 됐습니다.
그렇게 엽서는 끊겼고, 아버지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가족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아버지를 찾아 다녔고,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도 아버지가 보낸 3장의 엽서는 항상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4·3 유족 문혜형씨
하지만 당시 어렸던 딸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문 씨는 어머니에게 "이제는 버리자. 버려도 되지 않느냐"고 울며불며 따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니다. 아버지가 온다 했는데 이것을 왜 버리느냐"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9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문혜형씨 역시 어머니처럼 엽서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들었던 어머니의 말처럼 언젠가 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문혜형씨는 "아버지의 근거가 이거(엽서)라서, 만약에 좋은 세상이 오면 이걸로 아버지가 계신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이제까지 간직했던 거예요"라고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지난해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미 일흔을 훌쩍 넘긴 딸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보관만 하던 엽서의 내용도 처음으로 읽어봤고, 이내 목놓아 울었습니다.
제주4·3평화재단에 보관 중인 4·3 당시 엽서 원본
■ 동아시아 작은 섬에 새겨진 냉전의 상흔.. 그리고 화해
제주4·3평화재단에서 보관 중인 엽서는 문 씨 아버지의 것을 포함해 모두 15장.
문 씨의 아버지처럼 한 명이 여러장을 보낸 것도 있습니다.
당시에 글을 알고 엽서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쉽지 않았고, 또 글을 읽는건 성인쯤은 됐어야 했기 때문에 엽서의 주인공들은 이제 세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남아 4·3 진상규명 과정에 힘을 실었고, 이런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4·3특별법이 만들어져 대통령의 공식 사과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수형인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보상 작업까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의 힘입니다.
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들이 4·3기록물을 정비하는 모습
문혜형씨 아버지의 엽서를 포함해 4·3이 담긴 기록물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기는 작업이 본격화 된 것이 바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도전입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4·3기록물은 우선 3·1 결정서를 비롯한 4·3 당시의 기록물이 있습니다.
특히 당시 군사재판에 회부돼 수형과 사형을 언도 받은 2,530명 민간인들의 명단과 인적사항을 쓴 '수형인명부'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4·3 이후에 나온 유족의 증언부터 4·3특별법 개정이 이뤄지기까지의 자료도 포함됩니다.
정확한 갯수로는 3만 건이 조금 안됩니다만 3만 건 정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시킬 4·3 기록물
4·3 기록물의 가치를 말하자면 크게 2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는 당시 세계적인 냉전 상황이 동아시아의 작은 섬에서 압축돼 그대로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이후인데, 소위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해결방식이 아닌, 주민들이 스스로 치유와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다는 점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미워하는 감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마음을 누르고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4·3의 정신으로 불리는 화해와 상생인 것이죠.
이런 모습이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과거사 해결에 있어서도 모범 사례로 평가받기 때문에 유네스코를 통해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기록은 과거 넘어 현재·미래에도 여전히 '유효'
지금까지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은 적다곤 할 수 없습니다.
124개국에서 432건이 올라 있습니다.
몇 가지 꼽아보라면 1215년에 선포된 '마그나 카르타'와 체 게바라의 기록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d단조 등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등재시킨 나라는 24건의 독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16건이 등재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동의보감, 난중일기 등 옛 자료부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등 현대사 자료도 있습니다.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이 와중에 국가폭력 관점에서 4·3과 유사점을 보이는 것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꼽을 수 있겠네요.
5·18은 지난 2011년 등재됐는데, 특이점은 정부채널을 통하지 않고, 시민들 주도로 NGO(비정부)채널로 등재가 된 것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고로 5·18은 유네스코 등재 이후 기록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록관이 만들어진 점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영향은 기록물의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특히 높아지는 계기가 됐고, 현재까지도 새로운 기록물들이 기증되고 있습니다.
또 기록관에서도 실제 기록물과 내용은 물론 외형까지 똑같은 복본을 만들어 일반에 꾸준히 전시하고 있습니다.
실제 기록물은 보관 기준이 매우 까다로워 일반에 보여 질 수 없기 때문인데, 복본을 만들어서라도 대중과의 접근성을 늘린 겁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 중인 기록물 복본
■ "4·3을 위해, 당신의 10초만 내어주세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격년제로 이뤄지고, 정부채널을 통할 경우 각 회원국에서는 최대 2건을 제출할 수 있습니다.
제출은 문화재청에서 하는데 이번에 공식적으로 제출 의사를 보이는 것은 제주4·3을 비롯해 3·1운동 기록물, 또 산림녹화 50주년을 기념한 기록물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공공연히 등재를 추진한다고 들려오는 기록물만 10건 정도 됩니다.
모두가 훌륭하고 가치 있는 기록물들이기 때문에 어쩌면 유네스코 본 심사보다 예선격인 문화재청 심사가 더 까다로울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대한 평가가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감은 있고, 등재 유산 수도 많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세계기록유산이 주는 상징성은 대체 불가능입니다.
지난 달 20일 서울에서 진행된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출범식 모습
제주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도전은 공식적으로는 처음이지만, 사실 처음은 아닙니다.
10여 년 전인 지난 2012년 즈음부터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필요성을 꺼냈고, 2018년 제주자치도 차원에서 본격적인 등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국 위안부 기록' 등재 추진과 관련해 일본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유네스코 차원의 절차가 멈춰서며 실제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지난 2021년 심사가 다시 시작됐지만 이미 국내 심사를 통과한 '4·19혁명'과 '동학농민운동' 기록물이 이미 대상에 올라 있어서 도전 할 수 없었고, 이번에 다시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도 등재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힘 모으기에 나섰습니다만, 전망이 밝다고만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달 20일 서울에서 진행된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 출범식 모습
이런 유형의 일은 논란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은데, 갑자기 4·3에 대한 전국적인 이슈에 철 지난 '김일성 지시' 발언으로 메워졌기 때문입니다.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노력해 온 입장에서 보면 이 '뜬금포' 논란은 찬물을 끼얹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껏 4·3을 흔드는 단체 입장에선 좋은 먹잇감이 된 셈이라, 문화재청에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5·18 역시 등재 직전까지 북한군 개입설로 시달렸지만 끝내 등재됐기 때문에 흔드는 시도가 반드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흔들기는 곁가지일 뿐이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4·3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 가치는 충분한 만큼,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등재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겠죠.
4·3종합정보시스템 화면, 세계기록유산 등재 응원 글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제주자치도도 4·3종합정보시스템(https://peace43.jeju.go.kr/)을 통해 유네스코 등재 온라인 응원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사전심사가 다음 달 말로 예상되는 만큼, 이 기간 4·3 75주년 추념식을 비롯해 4·3 알리기에 특히 더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길다면 길 수 있는 이 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4·3종합정보시스템에 들어가 응원 캠페인에 응원의 말 한 줄을 부탁드리고 싶네요.
이름과 사는 지역을 선택하고, 한마디 글을 남기면 되는데, 10초 정도면 충분합니다.
작은 글 한 줄이지만, 분명 제주4·3에는 큰 힘이 될 겁니다.
JIBS 제주방송 이효형 (getstarted@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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