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에 '전깃불' 들어오던 날 ②['제주스토리'는 제주의 여러 '1호'들을 찾아서 알려드리는 연재입니다. 단순히 '최초', '최고', '최대'라는 타이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에 얽힌 역사와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26년 4월 21일. 제주에 처음으로 전깃불이 들어온 날입니다.
유구한 탐라 역사에서 번갯불이 아닌 전기에 의한 광원으로 어둠을 밝힌 최초의 날로, 고종 황제가 기거하는 경복궁 후원 건청궁에 불이 들어온 지 39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반가정에서 전기 없이 생활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에선 일부 일본인 거류민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해방 이전까지 제주엔 수익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전력설비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벼락처럼 다가온 해방은 제주도민들을 절대적 전력 빈곤 상황으로 내몰았습니다.
산업의 동맥인 전기가 부족해 육지부에서 제주로 이전한 기업들이 철수하는 사태도 빚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화사업(電化事業)을 완료한 지역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재일제주인의 애향정신과 마을 발전을 위해 헌신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입니다.
이번엔 해방을 맞고서도 오랜 시간 탈출할 수 없었던 제주의 절대적 전력빈곤 상황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삼무(三無)의 섬? 전기까지 없어서 '사무(四無)'
제주도는 거지와 도둑, 대문이 없어 예로부터 삼무(三無)의 섬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거지, 도둑, 대문 외에도 없는 것이 많은 섬이 제주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전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전기를 더해 '사무(四無)의 섬'으로 칭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수익성 부족을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던 설비투자 기조는 해방 이후에도 수십년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산업발전을 위한 동력의 이용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전등의 사용도 시내 일부 지역에서만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또한 가정집은 해가 떨어진 이후 제한된 시간에야 가능했고, 정전도 밥 먹듯 발생했습니다
해방 즈음 제주의 발전설비는 남선전기(옛 제주전기) 소유한 내연 발전기(80kW)와 서귀포수력(200kW),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했다가 공기업 형태로 개편된 주정공장의 자가발전기(300kW)가 전부였습니다.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은 공장을 돌리고 남는 전력을 제주읍 내 가정용 전기로 공급했는데 이마저도 연료 확보의 어려움이나 발전기 고장으로 정전 사태가 거듭됐습니다.
1947년 7월엔 주요 전력공급원 중 하나인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의 발전기가 고장난 상태에서, 남선전기의 내연 발전기마저 고장나자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던 제주읍은 10일 이상 완전한 암흑세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정용 전력은 주정공장이, 관공서 전력은 남선전기(한전의 전신)이 담당했습니다.
1953년 12월엔 주정공장이 운영난에 따른 발전용 석탄을 확보하지 못해 발전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주읍 내 일반가정엔 5개월 정도 전력공급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5월부터 전력 공급이 재개됐지만 그마저도 격일제로 하루 3시 10분 동안 제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후에도 연료 부족이나 발전기 고장으로 잦은 정전이 발생해 전기가 공급되는 게 오히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1955년 1월엔 주정공장이 세금을 미납해 당국이 공장기계를 압류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전력 공급이 중단될 위기 처하자 신문에 주정공장을 두둔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문은 "세원(稅源)을 죽이면서까지 세금받는 것이 세무행정의 본질이 아닐텐데 너 좋고 나 좋고 국가에도 도움될 길을 구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전력공급이 재개된지 반년 만에 다시 찾아온 정전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극심한 전력 부족이 이어지자 당국에선 밝기는 밝지만 더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고촉 전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단속했습니다. 아울러 전력 부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전기를 도둑질하는 이른바 '도전(盜電)'으로 보고, 전기 도둑을 잡기 위해 군과 경찰, 관청, 전력회사가 대대적인 합동 점검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1953년 1월엔 196건의 도전 등 계약위반 건을 적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전력부족은 제주에서 산업이 싹틀 수 있었던 가능성마저 앗아갔습니다.
정부는 6·25한국전쟁을 즈음해 경인지역의 대기업을 제주도로 이설시켰습니다. 당시 제주에 왔던 대표적 기업으론 조선피혁, 구미장유, 세계고무, 조일조무, 협신제약, 대정목재 등이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제주에 있었던 기설공장으론 제주조선, 동방식품, 대동식품, 한림제빙, 한림전분, 외도전분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제조업은 발동기를 이용해 동력을 얻어야 했는데, 극심한 전력난과 판로난 등 경제여건으로 태반이 휴업 상태로 있다가 육지부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기설공장 중 2~3곳만이 조업을 이어갔을 뿐, 나머지는 공장건물과 은행장부에 흔적을 남기고 사실상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절대적 전력난은 1956년 6월 18일 유니온 발전기(750kW)가 제주발전소에 설치돼 시내로 송전을 시작하면서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습니다. 이마저도 새로운 발전기에 연료 공급(경유)가 제때 이뤄지지 못해 잦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전력 사정은 한동안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전등 가설 호수는 제주도내 전체 가구수(6만 4,352호)의 10.4% 수준인 6,689호에 불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원천 공급되지 않는 지역만해도 당시 애월면, 남원면, 구좌면, 표선면, 성산면, 조천면, 한경면 등 7개면에 달했습니다.
1970년 3월 1만kW의 대규모 설비용량을 자랑하는 제주화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전력사정(이전까지 총 발전량은 5,700kW 수준)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전력수요도 덩달아 뛰면서 1970년대 중후반까지 전력 사용을 제한하는 규제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흥업소의 네온사인 광고를 금하고 병의원, 접골원에 한해 네온사인 간판 운영을 허락했습니다. 가정용 샹들리에 사용을 제한하고, 3층 이하 층을 오를 경우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일반 사무실과 상점, 숙박시설 등 업종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전등의 규격을 정해 단속을 벌이는 등 6·25한국전쟁 직후의 모습이 재현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다음 편에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화사업(電化事業)을 완료한 제주인의 저력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저작권자 © JIBS 제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도 최초의 전기회사 '제주전기 주식회사'의 사옥. 1925년 설립돼 1926 4월부터 사업을 개시했다. (『제주전기 77년 제주도 전력사』, 한전 제주본부, 2004)
1926년 4월 21일. 제주에 처음으로 전깃불이 들어온 날입니다.
유구한 탐라 역사에서 번갯불이 아닌 전기에 의한 광원으로 어둠을 밝힌 최초의 날로, 고종 황제가 기거하는 경복궁 후원 건청궁에 불이 들어온 지 39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반가정에서 전기 없이 생활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에선 일부 일본인 거류민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해방 이전까지 제주엔 수익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전력설비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벼락처럼 다가온 해방은 제주도민들을 절대적 전력 빈곤 상황으로 내몰았습니다.
산업의 동맥인 전기가 부족해 육지부에서 제주로 이전한 기업들이 철수하는 사태도 빚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화사업(電化事業)을 완료한 지역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재일제주인의 애향정신과 마을 발전을 위해 헌신한 제주도민들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입니다.
이번엔 해방을 맞고서도 오랜 시간 탈출할 수 없었던 제주의 절대적 전력빈곤 상황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삼무(三無)의 섬? 전기까지 없어서 '사무(四無)'
제주도는 거지와 도둑, 대문이 없어 예로부터 삼무(三無)의 섬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거지, 도둑, 대문 외에도 없는 것이 많은 섬이 제주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전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전기를 더해 '사무(四無)의 섬'으로 칭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수익성 부족을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던 설비투자 기조는 해방 이후에도 수십년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산업발전을 위한 동력의 이용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전등의 사용도 시내 일부 지역에서만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또한 가정집은 해가 떨어진 이후 제한된 시간에야 가능했고, 정전도 밥 먹듯 발생했습니다
해방 즈음 제주의 발전설비는 남선전기(옛 제주전기) 소유한 내연 발전기(80kW)와 서귀포수력(200kW),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했다가 공기업 형태로 개편된 주정공장의 자가발전기(300kW)가 전부였습니다.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은 공장을 돌리고 남는 전력을 제주읍 내 가정용 전기로 공급했는데 이마저도 연료 확보의 어려움이나 발전기 고장으로 정전 사태가 거듭됐습니다.
1947년 7월엔 주요 전력공급원 중 하나인 제주항 인근 주정공장의 발전기가 고장난 상태에서, 남선전기의 내연 발전기마저 고장나자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던 제주읍은 10일 이상 완전한 암흑세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정용 전력은 주정공장이, 관공서 전력은 남선전기(한전의 전신)이 담당했습니다.
1953년 12월엔 주정공장이 운영난에 따른 발전용 석탄을 확보하지 못해 발전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주읍 내 일반가정엔 5개월 정도 전력공급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5월부터 전력 공급이 재개됐지만 그마저도 격일제로 하루 3시 10분 동안 제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후에도 연료 부족이나 발전기 고장으로 잦은 정전이 발생해 전기가 공급되는 게 오히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1955년 1월엔 주정공장이 세금을 미납해 당국이 공장기계를 압류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전력 공급이 중단될 위기 처하자 신문에 주정공장을 두둔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문은 "세원(稅源)을 죽이면서까지 세금받는 것이 세무행정의 본질이 아닐텐데 너 좋고 나 좋고 국가에도 도움될 길을 구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전력공급이 재개된지 반년 만에 다시 찾아온 정전 공포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극심한 전력 부족이 이어지자 당국에선 밝기는 밝지만 더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고촉 전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단속했습니다. 아울러 전력 부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전기를 도둑질하는 이른바 '도전(盜電)'으로 보고, 전기 도둑을 잡기 위해 군과 경찰, 관청, 전력회사가 대대적인 합동 점검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1953년 1월엔 196건의 도전 등 계약위반 건을 적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전력부족은 제주에서 산업이 싹틀 수 있었던 가능성마저 앗아갔습니다.
정부는 6·25한국전쟁을 즈음해 경인지역의 대기업을 제주도로 이설시켰습니다. 당시 제주에 왔던 대표적 기업으론 조선피혁, 구미장유, 세계고무, 조일조무, 협신제약, 대정목재 등이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제주에 있었던 기설공장으론 제주조선, 동방식품, 대동식품, 한림제빙, 한림전분, 외도전분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제조업은 발동기를 이용해 동력을 얻어야 했는데, 극심한 전력난과 판로난 등 경제여건으로 태반이 휴업 상태로 있다가 육지부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기설공장 중 2~3곳만이 조업을 이어갔을 뿐, 나머지는 공장건물과 은행장부에 흔적을 남기고 사실상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절대적 전력난은 1956년 6월 18일 유니온 발전기(750kW)가 제주발전소에 설치돼 시내로 송전을 시작하면서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습니다. 이마저도 새로운 발전기에 연료 공급(경유)가 제때 이뤄지지 못해 잦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전력 사정은 한동안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전등 가설 호수는 제주도내 전체 가구수(6만 4,352호)의 10.4% 수준인 6,689호에 불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원천 공급되지 않는 지역만해도 당시 애월면, 남원면, 구좌면, 표선면, 성산면, 조천면, 한경면 등 7개면에 달했습니다.
1970년 3월 1만kW의 대규모 설비용량을 자랑하는 제주화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전력사정(이전까지 총 발전량은 5,700kW 수준)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전력수요도 덩달아 뛰면서 1970년대 중후반까지 전력 사용을 제한하는 규제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흥업소의 네온사인 광고를 금하고 병의원, 접골원에 한해 네온사인 간판 운영을 허락했습니다. 가정용 샹들리에 사용을 제한하고, 3층 이하 층을 오를 경우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일반 사무실과 상점, 숙박시설 등 업종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전등의 규격을 정해 단속을 벌이는 등 6·25한국전쟁 직후의 모습이 재현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다음 편에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화사업(電化事業)을 완료한 제주인의 저력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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