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에 '전깃불' 들어오던 날 ③['제주스토리'는 제주의 여러 '1호'들을 찾아서 알려드리는 연재입니다. 단순히 '최초', '최고', '최대'라는 타이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에 얽힌 역사와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열 집 가운데 고작 한 집만이 전깃불을 켤 수 있었던 제주도.
그 배경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내내 설비 투자를 받지 못했고, 해방 이후에도 비슷한 이유로 제대로 된 설비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던 원인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제주도가 전화(電化)사업, 즉 전력공급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사업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완수했다는 점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추진됐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농촌 경제 활력화를 위해 '농어촌전화사업'이 추진됐는데, 제주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 사업을 완료하게 된 것입니다.
제주도의 농어촌전화사업은 1965년 제주시(당시 북제구군) 한림읍 협재리와 서귀포 하효리를 시작으로, 1978년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이겨내며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헌신적인 지원과 제주에서 사업을 추진한 도민들의 의지가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우리 고향에 전기를"
재일동포들 1만불도 '척척'
'고향사랑 기부제' 원조격
척박한 산업 기반으로 마땅한 사업체가 없었던 제주에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본에서 번 돈을 제주에 있는 자녀의 학비와 생활비로 보내는 별거 가정이 드믄 경우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어버이는 일본에, 자녀는 제주도'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일교포의 지원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됩니다.
정부의 '교민개방정책'이 계기가 된 것인데요. 제주만 하더라도 이전까진 고향을 방문해도 제주4·3 등으로 인해 사상과 행동을 의심하는 감시의 눈초리가 있었는데, 이러한 기조에 변화를 줘 이들의 고향 방문을 적극 독려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턱없이 부족했던 국가 발전 재정 마련을 위해 재외동포들의 자본을 유치하겠다는 정부의 계산이 깔린 결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조 변화에 따라 특히 큰 수혜를 본 것은 제주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에만 10만 명이 넘는 제주인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책이 시행된 이후인 1962년에는 재일제주인개발협회가 두 차례나 제주를 방문하는 등 이 한 해에만 542명의 교포가 제주를 방문했습니다. 1960년 이전까지 친선교류차 고향을 방문한 교포가 20여명에 불과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였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고향 가족에 지원을 보내왔던 제주의 풍토는 이 이후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10리마다 학교 하나'라는 전국 최고의 교육 토양이 만들어졌고, 도로 포장, 상수도, 마을회관 등에도 재일제주인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1990년까지 제주에 들어온 재일제주일들의 성금은 집계된 것만 83억 원에 육박하는데, 이는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였다고 합니다.
전기 가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농어촌전화사업이 추진되기도 전부터 '우리 마을에 전기를 설치해달라'며 재일제주인들의 성금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1963년 6월엔 구좌읍 김녕리 출신 재일교포들이 거금 1만 불(당시 130만 원 상당)을 모아 기부했습니다. 1964년엔 제주시 용담동 출신 강윤옥 씨 등 14명이 닥그네 일대에 전기사업을 위해 90만 원을 기탁했습니다.
자금 부족으로 전화사업을 벌일 수 없었던 안덕면 사계리엔 총 사업비(800만 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성금 350만 원이 들어와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남원읍 위미리 출신 교포들은 일화 1천만 원의 거금을 쾌척했습니다.
그 결과, ▲안덕면 대평리(1968년 12월) ▲제주시 삼양동(1969년 2월) ▲애월읍 애월리(1970년 3월) ▲조천읍 신흥리(1970년 4월) ▲애월읍 곽지·금성·귀덕리(1970년 4월) ▲제주시 연동(1970년 8월) ▲한림읍 월령리(1970년 11월) ▲성산읍 신천리·신산리(1971년 2월) ▲대정읍 신도리(1972년 12월) ▲애월읍 신엄·구엄리(1973년 10월) 등에서 처음으로 전깃불이 켜졌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이러한 지원은 현재 추진 중인 '고향사랑기부제'의 원조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제도는 일정 금액을 고향 등 현재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 기부하면 세제혜택을 주는 제도로 올해부터 본격 시행됐지만, 제주의 모금률은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화(電化)사업 최초 완료한 제주
'꽃길' 아닌 '가시밭길' 거쳐온 결과
제주의 전화사업이 순탄한 꽃길만 걸은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에 더 가까웠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도움이 있었다곤 하지만, 자금부족은 항상 이겨내야 할 기본 과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제주에서도 집집마다 돈을 걷어야 했습니다.
1964년엔 마을 출신 재일교포들이 마련한 성금 1만 불을 활용해 전기사업을 추진하려던 구좌읍 김녕리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김녕리개발위원회는 한일기업이라는 업체와 전기시설공사 계약을 맺었는데, 한일기업이 다른 업체에게 하청을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겼다가 공사가 진행되지 않자 해당 하청업체로부터 사기 혐의로 피소된 것입니다.
가까스로 문제가 해결돼 1965년에 공사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이번엔 제주도 당국에서 법에 따른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공사중단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제주지역 업기업체들이 노임 단가를 올려달라며 사업 추진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농어촌전화사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한전의 외선공사 설계단가와 시가가 현저히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제주지역 전기공사업체들이 배전공사의 입찰에 응찰을 거부해 공사가 줄줄이 유찰되는 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 정부에서 정한 전공노임단가는 하루에 740원으로 전국 모든 지역이 동일하게 적용됐습니다. 이를 100원 이상 올려달라는 것이 업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업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수의계약마저 기피했습니다. 결국 제주도가 다른 지역 업자와 계약을 할 수도 있다는 엄포를 놓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일단락됐다고 합니다.
공사금액이 당초 예상액보다 훌쩍 불어나 주민들이 직접 경비 절담을 위한 방안을 제안하며 한전과 담판을 벌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서귀포 하효리에서 추진한 전화사업의 공사비가 당초 예상했던 650만 원에서 900여만 원으로 불어나 사업이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주민들은 광주에서 목포를 거쳐 들여오기로 했던 시설자재를 부산에서 직접 공수해 오는 방안과, 동력선 가설을 뒤로 미뤄 예산을 줄이는 방안 등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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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최초의 전기회사 '제주전기 주식회사'의 사옥. 1925년 설립돼 1926 4월부터 사업을 개시했다. (『제주전기 77년 제주도 전력사』, 한전 제주본부, 2004)
1960년대에 들어서도 열 집 가운데 고작 한 집만이 전깃불을 켤 수 있었던 제주도.
그 배경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 내내 설비 투자를 받지 못했고, 해방 이후에도 비슷한 이유로 제대로 된 설비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던 원인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제주도가 전화(電化)사업, 즉 전력공급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사업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완수했다는 점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추진됐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농촌 경제 활력화를 위해 '농어촌전화사업'이 추진됐는데, 제주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 사업을 완료하게 된 것입니다.
제주도의 농어촌전화사업은 1965년 제주시(당시 북제구군) 한림읍 협재리와 서귀포 하효리를 시작으로, 1978년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이겨내며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헌신적인 지원과 제주에서 사업을 추진한 도민들의 의지가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우리 고향에 전기를"
재일동포들 1만불도 '척척'
'고향사랑 기부제' 원조격
척박한 산업 기반으로 마땅한 사업체가 없었던 제주에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본에서 번 돈을 제주에 있는 자녀의 학비와 생활비로 보내는 별거 가정이 드믄 경우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어버이는 일본에, 자녀는 제주도'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일교포의 지원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됩니다.
정부의 '교민개방정책'이 계기가 된 것인데요. 제주만 하더라도 이전까진 고향을 방문해도 제주4·3 등으로 인해 사상과 행동을 의심하는 감시의 눈초리가 있었는데, 이러한 기조에 변화를 줘 이들의 고향 방문을 적극 독려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턱없이 부족했던 국가 발전 재정 마련을 위해 재외동포들의 자본을 유치하겠다는 정부의 계산이 깔린 결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조 변화에 따라 특히 큰 수혜를 본 것은 제주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에만 10만 명이 넘는 제주인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책이 시행된 이후인 1962년에는 재일제주인개발협회가 두 차례나 제주를 방문하는 등 이 한 해에만 542명의 교포가 제주를 방문했습니다. 1960년 이전까지 친선교류차 고향을 방문한 교포가 20여명에 불과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였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고향 가족에 지원을 보내왔던 제주의 풍토는 이 이후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10리마다 학교 하나'라는 전국 최고의 교육 토양이 만들어졌고, 도로 포장, 상수도, 마을회관 등에도 재일제주인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1990년까지 제주에 들어온 재일제주일들의 성금은 집계된 것만 83억 원에 육박하는데, 이는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였다고 합니다.
전기 가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농어촌전화사업이 추진되기도 전부터 '우리 마을에 전기를 설치해달라'며 재일제주인들의 성금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1963년 6월엔 구좌읍 김녕리 출신 재일교포들이 거금 1만 불(당시 130만 원 상당)을 모아 기부했습니다. 1964년엔 제주시 용담동 출신 강윤옥 씨 등 14명이 닥그네 일대에 전기사업을 위해 90만 원을 기탁했습니다.
자금 부족으로 전화사업을 벌일 수 없었던 안덕면 사계리엔 총 사업비(800만 원)의 절반에 육박하는 성금 350만 원이 들어와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남원읍 위미리 출신 교포들은 일화 1천만 원의 거금을 쾌척했습니다.
그 결과, ▲안덕면 대평리(1968년 12월) ▲제주시 삼양동(1969년 2월) ▲애월읍 애월리(1970년 3월) ▲조천읍 신흥리(1970년 4월) ▲애월읍 곽지·금성·귀덕리(1970년 4월) ▲제주시 연동(1970년 8월) ▲한림읍 월령리(1970년 11월) ▲성산읍 신천리·신산리(1971년 2월) ▲대정읍 신도리(1972년 12월) ▲애월읍 신엄·구엄리(1973년 10월) 등에서 처음으로 전깃불이 켜졌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이러한 지원은 현재 추진 중인 '고향사랑기부제'의 원조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제도는 일정 금액을 고향 등 현재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 기부하면 세제혜택을 주는 제도로 올해부터 본격 시행됐지만, 제주의 모금률은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70년 8월 20일 열린 제주시 연동 전기점화식. 이날 당시 권용식 제주지사와 김한준 제주시장을 비롯한 1천여 주민들이 참여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도)
전화(電化)사업 최초 완료한 제주
'꽃길' 아닌 '가시밭길' 거쳐온 결과
제주의 전화사업이 순탄한 꽃길만 걸은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에 더 가까웠습니다.
재일제주인들의 도움이 있었다곤 하지만, 자금부족은 항상 이겨내야 할 기본 과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제주에서도 집집마다 돈을 걷어야 했습니다.
1964년엔 마을 출신 재일교포들이 마련한 성금 1만 불을 활용해 전기사업을 추진하려던 구좌읍 김녕리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김녕리개발위원회는 한일기업이라는 업체와 전기시설공사 계약을 맺었는데, 한일기업이 다른 업체에게 하청을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겼다가 공사가 진행되지 않자 해당 하청업체로부터 사기 혐의로 피소된 것입니다.
가까스로 문제가 해결돼 1965년에 공사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이번엔 제주도 당국에서 법에 따른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공사중단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제주지역 업기업체들이 노임 단가를 올려달라며 사업 추진을 거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농어촌전화사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한전의 외선공사 설계단가와 시가가 현저히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제주지역 전기공사업체들이 배전공사의 입찰에 응찰을 거부해 공사가 줄줄이 유찰되는 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당시 정부에서 정한 전공노임단가는 하루에 740원으로 전국 모든 지역이 동일하게 적용됐습니다. 이를 100원 이상 올려달라는 것이 업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업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수의계약마저 기피했습니다. 결국 제주도가 다른 지역 업자와 계약을 할 수도 있다는 엄포를 놓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일단락됐다고 합니다.
공사금액이 당초 예상액보다 훌쩍 불어나 주민들이 직접 경비 절담을 위한 방안을 제안하며 한전과 담판을 벌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서귀포 하효리에서 추진한 전화사업의 공사비가 당초 예상했던 650만 원에서 900여만 원으로 불어나 사업이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주민들은 광주에서 목포를 거쳐 들여오기로 했던 시설자재를 부산에서 직접 공수해 오는 방안과, 동력선 가설을 뒤로 미뤄 예산을 줄이는 방안 등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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